고구리.대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티베트와 청해성를 순시한 광개토태왕 (6/8부)
토곡은 지금의 청해성 일대로 대대로 우리 민족의 땅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8/17 [10:45]

3. 비문의 토곡(土谷)은 어디인가?

광개토태왕 비문의 8년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원문)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莫斯羅城, 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번역) 8년 무술에 일부 군대를 변경의 백신(숙신?) 토곡에 보내어 살피게 하여 인하여 다시 막사라성, 가태라성에서 남녀 3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조공하여 일을 논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토곡(土谷)을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토곡혼(吐谷渾) : 4세기 초 중국의 청해(菁海) 지방에 있던 나라 이름. 왕족은 선비(鮮卑)로 5호16국 시대부터 세력을 떨쳤으나 뒤에 북위ㆍ수ㆍ당의 토벌을 받아 663년에 도번(吐藩)에게 멸망당하였음” 

토(土)자가 약간 다르나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토곡혼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미천대제 30년(329년) 엽연이 왕이었던 아비(토연)의 이름을 성씨로 삼는 것을 예의로 여겨서 나라 이름을 토곡혼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토곡혼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즉 토곡혼과 고구리는 관련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청해(靑海)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현재 섬서성 서쪽 청해성에 있는 내륙호수인 청해를 말하는 것으로 나온다. 아래 설명에서 보듯이 서해(西海)를 중국에서 5호16국 시대부터 청해로 부른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청해의 서쪽은 고대 중국의 땅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 이후 명나라 때까지도 계속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동진 때 토곡혼으로 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번역) 청해 : 청해는 옛날 서해, 선수해, 비화강해로 칭했고, 5호16국 때부터 청해로 불렸다. 중국의 서부에 있으며 동북 경계는 감숙성, 동남 경계는 사천성, 서남 경계는 티베트, 서북 경계는 위구르로 길이가 600리 폭이 2,000리로 우공의 4융의 땅이었다. 3대(하.은.주)를 지나 한나라 때까지 서강, 동진 이후에는 토곡혼이라 했으며, 당나라 초기에 토번으로 편입되었고, 명나라 무종 때 몽골의 수족이 점거하기 시작했다.
(원문) 青海 : 青海古称西海、鲜水海、卑禾羌海,自十六国时期称青海。在我国西部,东与北皆界甘肃,东南界四川,西南界西藏,西北界新疆,长六百里,广二千里,禹贡四戎地,历三代至汉为西羌,东晋以后为吐谷浑,唐初入于吐蕃,明正德间,始为蒙古首族占据,

▲ 토곡은 지금의 청해성과 티베트 일대로 이곳은 대대로 단군조선과 고구리의 영토였다     ©편집부


또한 “<후한서 동이전>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后汉书东夷传》夫余国北有弱水,《晋书四夷传》挹娄国东滨大海,北极弱水)”라는 기록이 있듯이, 내몽골 서남단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흐르는 약수 남쪽에 부여국과 읍루가 있었다는 설명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 일대는 대대로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의 일원으로 서쪽 제후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약수 남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의 기원에 대해 북애자 노인이 쓴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국조 단군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부루(夫婁)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는 서쪽 땅을 주어 다스렸다고 한다. 부여라는 이름은 왕검의 4째 아들로부터 온 것으로, 부여는 대대로 조선대연방의 일원으로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 일대에 있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록들 특히 ‘토곡을 살피게 했다’는 비문의 기록은 고구리의 도읍을 한반도에 놓고서는 거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인 지금의 반도사관은 대단히 잘못된 역사이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구리의 핵심강역(도읍)은 산서성이었으며, 흉노로 대변되는 감숙성과 청해성과 티베트가 모두 고구리의 연방이었기 때문에 위 기록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의 하나가 바로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분쟁인 것이다.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는 “한국은 형제국”이라 하며 한국 방문을 추진하려 했다가 중국의 방해로 무산된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 약수 근처인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고구리 벽화.     © 편집부
▲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고구리 벽화     © 편집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2/08/17 [10: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바로 알자 12/09/17 [00:46] 수정 삭제
  성헌식은 백제와 연합한 왜를 지나지역에다 위치시켜 놓고 왜 열도를 왜라고 설명하고 있는 영상을 올려 놓지? 백제연방국이였던 왜의 위치도 제대로 모르는 성헌식이 민족사를 논한다는 자체가 코메디같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