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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환웅과 삼신문화 (1부)
치우환웅의 개화사상과 중원 정복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기사입력  2012/10/26 [19:45]
다음은 10월 19일(금) 오후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의 제1발제문이다.

1. 머리 말
2. 치우환웅의 개화사상
3. 치우환웅의 중원 정복
4. 환웅의 佺戒와 祭天
5. 首尾均平位와 和白
6. 치우환웅의 수련법
7. 맺는 말 

1. 머 리 말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치우환웅을 나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자가 『서경(書經)』을 쓰면서 치우를 중국 헌원(黃帝)에게 반역한 악인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사마천도 사기를 쓰면서 공자를 따라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蚩尤作亂).”란 말을 그대로 이어 받아 결국 치우는 역사의 악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문헌에는 치우환웅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환단고기』에서는 치우환웅이 단순한 군신(軍神)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삼신(三神)문화를 드높인 명군으로 기록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치우환웅이 헌원과 10년 전쟁을 벌였다는 내용은 한․중 양국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오는데, 공자와 사마천은 치우가 져서 중원 땅을 잃었다고 기록한 반면 우리 문헌에는 치우를 중국의 시조 헌원(황제)을 당당하게 토벌한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한․중 간의 상반되는 역사기술은 중국이 중화사관(中華史觀)에 따라 기록했으나 우리는 사실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치우환웅은 비단 무력으로 중원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을 식민지화하여 우리 문화를 심어준 분이었다. 즉 중국문화를 만들어준 분이었다. 그러니 중국에서 1995년 탁록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지어 치우제를 황제, 염제와 함께 중화문화의 공동시조로 받들고 있는 것이다.

▲ 북경 근처 가짜 탁록에 모셔져 있는 치우천왕(왼쪽)과 황제헌원, 염제신농. 중국은 이미 치우를 중화 3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2. 치우환웅의 개화사상 

사마천은 『사기』에서 치우(청구)가 헌원(황제)을 정벌하였다는 사실을 거꾸로 헌원이 치우를 잡아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치우가 헌원과 싸워 이긴 전투를 탁록 전쟁이라 한다. 치우는 이 전쟁을 하기에 앞서 헌원에게 격문을 보냈다. 

너 헌원은 들어라. 하늘의 아들은 단 한 사람 나다.
너는 삼신의 가르침 즉 천명을 어긴 역적이다. 항복하라.

이리하여 헌원은 치우환웅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헌원이 이겼다고 왜곡하였다. 그러니 사마천의『사기』는 중국 최초의 동북공정이었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 보면 치우환웅은 한국인(청구인)이었고 천병(天兵)을 이끌고 헌원(중국의 조상)을 토벌하여 서토(중원)를 점령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아울러 중국에 우리의 삼신문화를 심었다고 하였다. 중국은 당초 한국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헌원이 무식하여 치우와 싸워 연전연패하다가 후에 동방의 선진문화를 배워 치우와 싸워 다소 유리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치우는 중국인이 아니며 무만 알고 문을 모르는 장군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군왕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치우환웅이 중국을 정복한 뒤 야만국인 중국에다 우리 삼신문화를 심어 교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싸울 때는 무(武)로 이겨야 하지만 이긴 후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와 항복하는 적을 어루만져야 한다. 적이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죽이거나 노예로 부려먹으면 안 된다.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교화(敎化)’라 한다. 교화한 다음에 비로소 치화(治化)되는 것이다. 교화 없이 치화하면 적이 마음속으로부터 귀순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으로 무를 다스린다는 말 즉 문승(文勝) 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치우환웅을 군신으로 알고 씨름이나 궁술의 시조로 알고 있으나 치우환웅에게는 다른 일면이 있었으니, 환국의 삼신문화를 계승하여 배달국을 강국으로 만들고 이웃한 후진국들을 개화(開化)시켰던 것이다. 개화는 무화(武化)가 아니라 문화(文化)를 말한다. 化는 ‘바꾼다’, ‘고친다’는 뜻으로서 야만인을 문명화시키는 것을 이화(理化)한다, 교화(敎化)한다, 치화(治化)한다고 하는 것이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 치우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편집부


3. 치우환웅의 중원 정복 

『환단고기』에 의하면 치우환웅은 배달국 신시의 자오지 환웅(14대)이었다. 치우환웅은 먼저 무력으로 중원을 정복하여 배달국 신시의 영토를 동서 1만 리의 대국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치우환웅의 정신은 단군을 거쳐 부여, 고구려로 이어졌다. 그리고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그리고 연개소문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비단 치우환웅이 물려준 강토만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이어 국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치우환웅의 무력 즉 그의 강한 주먹만 기억하고 그의 부드러운 문화를 잊고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환단고기』를 다시 정독하여야 한다. 

치우환웅께서는 서쪽으로 탁예(琢芮 탁록과 예성)를 정벌하고 회대(淮垈 회수와 대산)를 평정하여 산을 개척하고 길을 내시니 그 강토가 1만 리에 이르렀다. 

치우환웅이 청구(靑丘에서 일어나시어 / 만고(萬古)에 무성(武聲)을 떨치시니 / 회수태산(淮水泰山) 일대가 모두 천황에게 귀순하였고 / 어느 누구도 침략해 들어오지 못하였다. 

치우환웅이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闢土地), 지하에서 동철을 채광하여(採銅鐵) 무기를 만들어, 군대를 훈련하고 산업을 일으키니(練兵興産), 구환이 모두 하나가 되어 그를 한 조상으로 삼았다(時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 

그러니까 농업과 산업과 군사의 여러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키신 분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큰 공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문화였다. 이 문화는 선대의 환웅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통치술이었다.
환웅 1세는 개천(개국)하여 천경(천부경)과 신고(삼일신고)를 강론하여 백성들을 크게 깨우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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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26 [19: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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