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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제사의 역사적 사례와 문화적 의미 (1부)
 
박선식 한국인문과학예술교육원 대표 기사입력  2012/10/31 [15:52]
Ⅰ. 여는 글
Ⅱ. 동아시아 상고영웅인 치우의 이미지 변화 가능성
Ⅲ. ‘별일치우(別一蚩尤)’ 그리고 ‘두두리(豆豆里)’
Ⅳ. 치우제사의 역사적 사례 검토
   -한국 내 비전 역사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Ⅴ. 맺는 글


Ⅰ. 여는 글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겠으나 동아시아의 각 처에서는 다양한 고고유물이 해당시기를 달리하며 출토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전쟁과 관련한 물질자료는 인간 사회에 드리워진 위기와 갈등의 문제가 결코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함께하는 현상임을 되뇌이게 한다. 더불어 무려 4,700여 년 전으로까지 소급되어 거론되는 치우와 황제의 대립과 그에 따른 전쟁 관련 설화의 전승은 동아시아의 인간사회가 이미 상고시기부터 쟁투와 대결의 고단한 현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자』를 보면, 치우와 황제의 시기에, “맹수의 손톱과 어금니에 삼가 도망을 갔고, 쓰던 그릇은 정교하지 않았고, 산림을 불태우고 숲을 깨기도 무성하게도 하고, 늪과 진펄을 불사르고 금수를 내쫓아 결실이 있고서 사람들에게 보탬이 된 뒤에야 천하를 얻어 다스렸다”고 한다. 

맹수의 창궐에 두려웠고, 그릇 따위의 생활도구는 조잡하여 기술력의 개선이 요구되었으며, 주거환경의 편익을 위해 숲을 일정하게 부수고 가꾸는 등 정신없었고, 으슥한 늪을 불살라 위생수준을 높였으며 금수를 몰아내어 위험도를 줄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만큼 그 시기가 사람살기가 벅찬 상황이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한 불안정한 국면의 시대상황은 강한 영웅상에 대한 존숭의 관념을 불렀을 테고, 마침내 제례로 숭앙하는 제의로 정착했다고 보인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치우와 황제에 대한 전승을 놓고 볼 때 애초의 대립적 관계 때문인지 내용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뿐더러 치우와 황제에 대한 존숭의 정도 역시 시대를 달리한 측면이 감지되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기까지 하다. 특히 치우가 헌원을 이기고 중원의 제후인 황제로 임명했다고 기록한 한국 내 비전(秘傳)자료와 달리 중국 내 문헌의 일부에서 황제가 치우를 제압하고서 죽이는 것으로 종식을 고했다는 보편적 내용과는 달리 치우를 신하로 임용했다는 특이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자공이 공자에게 ‘황쩨사면(黃帝四面)의 고사’를 묻자, “황제는 자신에 맞는 네 사람을 취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방을 다스리게 했다.”라고 답했다는 『시자(尸子)』의 내용이 그러하다.  

거론된 네 사람 가운데 치우가 황제의 신하로 속해 있는 점이 주목되는 점이다. 그 같은 내용은 이미 서기전 5세기경 중국 내 학계의 여론이 치우가 마치 황제의 지도체계 속에 편입되어 한 직능을 담당하는 신료의 일원인 듯이 거론되었고, 그 결과는 치우보다 황제에게 정당성을 더 부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더불어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문헌 가운데 황제의 명칭이 덧입혀지거나 그의 신하들의 이름으로 된 문헌이 27종이나 된다는 점이 확인되는 것은 이미 선진 시기에 황제 숭배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흔히 전설의 시대라고도 운위되는 치우와 황제의 시기에는 절륜의 기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던 것처럼 거론되는 기록들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이루(離婁)의 경우가 그러하다. 오죽하면 맹자조차 그를 거론한 것은 치우와 황제의 시기에 걸출한 기인재사들이 많았다는 전승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같은 기인재사의 조명은 거칠고 고단한 당시 상황 속에서 보다 생활에 유용한 인간상의 척도가 월등하고 절륜한 기량의 소유자에게 주목한 데 따른 현상은 아니었는지 고민하게 한다. 따라서 애초 반란 세력의 수괴정도로 폄훼된 치우조차 황제의 한 신하로 복무했다든지, 혹은 진한의 시기에 이르러 아예 제사의 신격으로 숭앙되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 치우 학술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는 박선식 한국인문과학예술교육원 대표     © 편집부

한편 중국 내 학계의 여론과는 달리 상고 이래 고대의 일부 학인의 손을 거쳐, 치우가 숭앙의 대상으로 거론된 점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삼성기」,「단군세기」, 「태백일사」, 『규원사화』등이 그러하다. 특히 『규원사화』의 ‘단군기’와 「단군세기」를 보면 치우를 제사지내고 존숭의 대상으로 한 내용이 여러 부분에 걸쳐 발견된다. 특히, 「단군세기」의 ‘16세 단군 위나(尉那)’ 부분의 내용을 보면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거론이 소위 위서로 몰리고 있는 「단군세기」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합리적으로 진실여부를 판정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해당 부분의 단군이 ‘위나(尉那)’인데, 고구려의 현재 유적 가운데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존재하는 점은 한 실마리를 여는 단초로 짐작된다. 오늘날의 위나암성 유적지를 보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고,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은 유물의 수습상황으로 보아 상고시기의 역사성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치우에 대한 제사가 상고 이래로 고려조의 팔성당(八聖堂) 건축과 연관되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팔성당에 모셔진 8위(八位)를 두고 고려사의 기록자들은 불교적 존재로 서술하고 있지만, 조선 숙종원년에 북애자가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는 『규원사화』를 보면 8위의 한 분이 분명 치우천왕인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고려조에 치우에 대한 제사가 팔성당에서 이루어진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팔성당과는 별도로 치우를 간접적으로 존숭한 사례는 대청간(大淸觀)의 마제 봉행사례이다. 대청관은 태청간(太淸觀)이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도교 신앙의 내도량(內道場)적 성격을 띤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마제(禡祭)를 지냈고, 마제에서 치우는 존숭의 신격으로 좌정했다. 그 후 고려의 마제 봉행은 조선에 이어졌고, 마제 봉행 시 신격은 치우와 황제가 공존하기도 했다가 치우만의 단독 봉행으로 치러진 경우로 구분되기도 했다. 수렵(狩獵)을 통한 강무(講武)행사의 경우에 치우를 단독 신격으로 모신 점이 그러하다.

또한 치우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거론되는 독기(纛旗)와 그 깃발의 숭배의식이던 둑제 거행 기록도 있다. 그런데 독기가 치우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는『이의실록(貳儀實錄)』이나 그것을 거론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기록을 세심하게 검토하면, 과연 독기 자체가 치우와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작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부분에는 황제 헌원이 만들어 썼다는 오채기(五彩旗)가 거론되고 있고, 그 오채기는 우리의 역대 풍속 가운데 익숙한 물품으로 활용된 五方旗와 의미와 실체상 차이가 없는 점이 혼란을 느끼게 한다. 五方旗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기 자체로서 치우와 연관 짓기는 좀 더 구체적인 자료의 발굴이 있은 뒤에 보다 상세한 분석이 있어야 할 듯싶다.

어떻든 동아시아 상고 전쟁영웅이던 치우에 대한 존숭의 정서와 의식은 존재했고, 그러한 바탕 위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시대에 공히 제사행위가 베풀어진 점이 확인된다. 본고는 그 같은 역사적 사례가 지닌 문화적 의미와 관련 풍속을 함께 다루며, 21세기의 관점에서 그러한 제사 전통이 한국인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소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곧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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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31 [15:5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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