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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 보존 문제와 치우사당 복원의 당위성 (1부)
동방의 진정한 군신.무신.전신인 치우천왕을 한낱 촉장 관우가 대체
 
박정학 치우학회장 기사입력  2012/11/12 [14:44]
1. 들아가는 말
2. 치우천왕에 대한 올바른 이해
3. 우리나라 관왕묘 보존실태 및 문제점
4. 치우천왕 사당 건립의 당위성
5.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지금은 조선시대와 달리 중국의 속국도 아닌데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중국의 소설 속 인물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면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정부는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우리 축구대표팀의 서포터즈 붉은악마들의 상징, 승리의 신인 우리 조상 치우천왕의 사당은 무너져도 복원하지 않으면서 중국인 관우의 사당은 우리 세금을 들여서 관리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더욱 화를 낼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 때에 건립된 문묘(文廟)와 무묘(武廟)가 매우 많다. 문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의 대성전에는 공자와 중국의 저명한 유학성인들을 비롯하여 111명의 유학성인들을 봉안하고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 중 우리나라 사람은 18명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한편, 무묘(武廟)는 충무공을 배향하는 사당이 아산의 현충사 등 여러 곳 있는 외에 최 영, 임경업 등 일부 장수들의 사당이 유명무실하게 유지되고 있는 반면, 임진왜란 직후 건립되어 초나라의 관우를 배향하고 있는 관성묘(關聖廟) 또는 관왕묘(關王廟)가 전국적으로 20여 곳 있는데, 중요한 곳은 대부분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중 7곳은 현재 우리 정부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어 우리 세금으로 관리되고 있어 더욱 국민들의 분노를 살 수 있다. 

묘(廟)와 단(壇)은 당(堂)과 달리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정부가 공공적으로 관리하는 사당을 말하므로 그 중요성 면에서 앞선다.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학자들도, 무인들도 많다. 그런데 앞에서 보듯이 문묘도 무묘도 중국인을 배향하는 데 많은 공적인 예산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나라 무인 중에서는 누가 뭐래도 한․중․일 삼국에서 군신으로 받드는 치우천왕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 때까지 나라에서 군인이 출병할 때 그의 사당에 제사를 지낼 정도로 받들어 모셨는데, 1970년대에 허물어지고 나서 아직 복원을 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 치우천왕 사당을 건립하는 것은 옛날처럼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고 만들어냈던 진취적ㆍ포용적ㆍ역동적 민족성이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마당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치우천왕의 사당을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온 세계의 어려움을 푸는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사명감을 키우는 일이므로,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본인은 치우학회의 회장으로서 무묘, 그 중에서도 치우천왕과 관우의 사당으로 제한해서 요약된 의견을 발표하고자 한다. 

▲ 청중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편집부

 
2. 치우천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치우천왕이 우리 국민들 앞에 크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1990년대 중반에 창설된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의 상징으로서, 16강 진입을 바라던 우리들에게 4강까지 들어가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주었고, 당시 거리 응원에서 보여준 역동성을 확인하고는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이런 저력이 있었는가?’를 자문할 정도로 민족의 자존심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1) 역사 속의 치우천왕

앞에서 다른 분들이 발표를 했지만, 우리의 조상인 치우천왕은 배달나라 14대 임금으로 처음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금속병기를 만들고, 전기(戰技)와 전술을 개발한 후에 역동적인 민족성을 활용하여 순식간에 중원지역을 장악하고도 포용성을 발휘하여 가장 집요했던 상대인 헌원을 중원지역 제후인 황제(黃帝)로 임명하여 우리 문화를 중원에 퍼뜨린 한류의 원조이자 시대적 영웅이셨다. 쉽게 이야기하면 앞섰던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이용하여 기마종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원을 점령하고 대대적 군사공동체인 한민족을 형성한 우리 민족과 묘족의 시조격인 분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처음 한족(漢族) 통일 국가를 이룬 한 고조 유방이 통일 전쟁의 마지막 풍패 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제사지냈고, 승리 후 치우사당을 새롭게 지어 연례적으로 배향하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때와 조선 때까지 특히 우환이 있을 때는 임금이나 장수들이 수시로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한․중․일 삼국에서 군신, 승리의 신으로 숭앙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민속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장성, 집안을 여러 재해로부터 지켜주는 치미와 귀면와, 대형 건물 앞의 해치처럼 건물을 지켜주는 방호신 등으로 남아 있으며, 민속씨름의 승자에게 황소를 상으로 주는 데서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은 치우의 백전백승의 전투능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치우천왕의 중원공략도     © 편집부

2) 치우와 붉은악마

치우천왕은 이처럼 군신이면서 승리의 상징이고, 붉은색은 그를 상징한다. 여기서 붉은색이란 것은 한자의 적(赤)색으로서 빨강(紅)과는 좀 다르면서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보다 스페인 축구 선수 유니폼 색깔이 여기에 더 가까울 것이다.  

적을 제압하는 데 좋은 색깔이어서 치우천왕 때 썼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한서』지리지에 매년 10월 치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낼 때 붉은 기운이 솟아올라 치우기의 모습을 더했다는 내용으로부터, 『산해경』에 등장하는 붉은 단풍나무를 치우목이라고 한다거나, 염주(鹽州)의 붉은 소금호수를 치우혈(蚩尤血)이라고 부르는 등의 중국 민속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대부분 나라의 부적을 붉은색으로 쓰며, 동짓날 붉은색의 팥죽을 대문 등에 뿌려 액을 막는 데 쓰이는 데서도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는 벽사신면(辟邪神面)인 도철(饕餮)상을 치우라고 하는데, 도깨비 박사로 통했던 고 조자용 박사도 ‘치우는 우리에게 도깨비로 살아 있다’고 했으며, 박희준은 독제(纛祭)가 치우와 연관 있다는 점에서 독(纛)과 둑, 뚝, 두꺼비에서 도깨비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매우 시사적인 게 붉은 도깨비다. 우리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붉은 도깨비는 힘이 매우 세고 장난은 좋아하지만,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도와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즐긴다고 하니 치우천왕과 도깨비, 붉은색, 방호와 승리의 신 등과 통하는 이야기가 된다.
 
▲ 치우천왕의 이미지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가 치우를 상징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필자가 2000년 경 붉은악마 단장 및 현 응원기 디자이너인 장부다씨와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알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응원기를 가지고 시험과 의견을 종합하던 중 2002년 직전인 1999년경에 최종적으로 붉은 도깨비 기로 결정이 되면서 상징도 확정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붉은악마는 붉은 도깨비와도 연결이 된다.

  또한 군 복무 시 전쟁기념관 입구 현관 위 천정에 새겨져 있는 귀면 그림을 디자인한 조 벽씨도 도안할 당시에는 전혀 치우도 몰랐고, 그가 전쟁신이나 군신이라는 것도 몰랐다고 그 후 한배달에 와서 실토한 적이 있다. 그런데 군신, 전쟁신의 상징인 도깨비 문양이 전쟁기념관의 입구, 제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은 그냥 우연이기만 할까? 

▲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 붉은 악마의 엠블렘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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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1/12 [14:4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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