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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관왕묘의 보존실태 및 문제점 (3부)
중국의 속국도 아닌 지금도 국민의 혈세로 관우를 모심 (?)
 
박정학 치우학회장 기사입력  2012/12/10 [16:09]
3. 우리나라 관왕묘의 보존실태 및 문제점

조선시대까지 한양에도 치우를 배향한 둑(독,도)신사(纛神祀)와 마제단(禡祭壇)이 도성 안팎에 각각 있어, 군의 출전 전에 임금이나 고급 관료, 장수들이 참석하여 제를 지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임진ㆍ정유 양란을 겪으면서 명나라의 입김에 의해 점차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배향하게 되었다. 

관우를 무왕으로 모시는 관우신앙은 명나라 때 활성화되었으며, 정사인 『삼국지』와 달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매우 용감하고 잘 싸운 장수로 나오는데 이는 ‘한ㆍ중ㆍ일 삼국의 군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치우천왕이 동이족이기 때문에 이를 꺾을 수 있는 한족의 무신을 만들기 위해 쓴 소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의 관왕묘는 ‘중국 명나라 임금의 강요에 의해’, 또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의 속국도 아닌 지금도 민간신앙의 차원을 넘어 우리 국민의 혈세를 ‘중국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그들의 영웅을 모시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간단히 짚어본다. 

1) 우리나라 관왕묘의 건립 과정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민간신앙으로 싹튼 관우 신앙이 명나라 때 정치적으로 활용되면서 정부는 물론 가정마다 관우를 모실 정도로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명나라 장군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심어져 무신(武神)과 재신(財神)으로 받들면서 관성묘(關聖廟)ㆍ관왕묘(關王廟)ㆍ관제묘(關帝廟) 등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관왕묘가 최초로 세워진 것은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이 마귀(魔鬼) 장군과 함께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 동자동에 거처를 정하고 요양을 하면서 이곳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남관왕묘(南關王廟) 즉 남묘(南廟)가 그 기원이다.  

이어서 서울 동쪽에 건립된 동관왕묘(또는 동묘東廟)는 진린 장군이 고국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에게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관우신이 나타나서 도와주었기에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보고하여 신종이 칙령을 내리고 현판을 써주어 1599년에 착공하여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1602년 봄에 준공되었는데, 건축양식까지 중국의 관왕묘를 본떠 만든 중국풍이다. 

이 당시 지방에도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여러 관왕묘가 세워졌다. 선조(宣祖) 31(1598)년 명(明)나라 장군 유정(劉鋌)이 남원부(南原府) 동문 밖에 소상(塑像)과 비석을 세운 것을 시초로 여러 번의 변화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남원 관왕묘, 같은 해 명나라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쉬후첸(薛虎臣)이 돌로 관우의 상을 만들어 봉안했던 안동 관왕묘,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소상(塑像)을 세워 건립한 성주 관왕묘,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고금도에 세웠던 강진 관왕묘 등을 비롯하여 대부분 명나라 장수들이 직접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워진 것들이다. 

그 이후 숙종 후기에는 음신화됨에 따라 관왕묘에 대한 제사를 일시 폐지했다가 다시 고종 때에 회복되면서 서울의 서묘(1902)ㆍ북묘(1883)ㆍ숭의묘(1903) 등이 세워지고, 민간신앙적인 방향으로 활성화되어 서울 명륜동 관성묘, 고종 후궁 엄상궁이 세웠다는 중구 예장동의 와룡묘, 명성황후의 명을 받은 민간인들에 의해 건립된 강화도의 3개 관제묘(1885~1892), 그 외 영동ㆍ전주ㆍ여수ㆍ완도ㆍ김제 등 지방에서도 무속적인 성격과 연결되면서 다수의 관왕묘가 건립되었으며, 조선조말 엄비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건립경위를 알 수 없는 서울 중구 장충동의 관성묘와 임진왜란 직후 민간인에 의해 세워졌다고는 하나 역시 정확하지 않는 방산동의 성제묘 등 총 20여개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 우리나라에 있는 대표적인 관왕묘들     © 편집부


2) 관왕묘의 보존 실태 및 문제점

이처럼 우리나라의 관우신앙은 명나라 정부나 명나라 장수가 관련되어 건립된 관왕묘는 당시의 외교적 입지로 인해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임금이 배향을 하는 등 관리와 제의에 신경을 씀으로써 정부로부터 민간으로 퍼져나간 특색이 뚜렷하며, 고종 때는 명성황후의 영향으로 민간 관우신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미신이라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고종이 1908년(융희 2) 향사(享祀) 정리를 하면서 관왕묘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의 제사는 폐지하였다. 그리고 1909년 경 서울 서묘와 북묘는 동묘에 합사하고 없어졌다. 그 후 공식 제사는 지내지 않고 지방의 주민들이나 무속인들에 의해 경칩일과 상강일을 비롯 연간 수회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 중 아래와 같이 일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나름대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국민의 혈세로 이 시설들을 관리하고 있다.
 

이름

규모

지정 구분 및 연도

주소

서울 동묘

2,818평

보물 제142호,(1963)

종로구 숭인동 238-1

서울 관성묘

16평

서울시 민속자료 제6호(1974)

중구 장충동2가 186-140

서울 와룡묘

1동

서울 민속자료 제5호(1974)

중구 예장동 산5-6

서울 성제묘

1동

서울 유형문화재 제7호(1972)

중구 방산동 4가 96

남원 관왕묘

1동 83㎡

전북 유형문화재 제22호(1973)

남원시 왕정동 21

안동 관왕묘

5동

경북 민속자료 제30호(1982)

안동시 태화동 604

전주 관성묘

1동

전북 문화재자료 제5호(1984)

전주시 동서학동2가 613


정부의 예산을 사용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토지가 재산으로 잡혀 있으므로 세금이 나간다. 그리고 유지보수비와 관리운영비(인건비 포함)가 등급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책정이 될 것이며, 특별히 연구를 하여야 할 경우 별도의 프로젝트로 추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한 액수의 정부 예산, 즉 국민의 혈세가 이 떳떳할 것 같지 않은 문화재의 보존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외의 경우 서울의 동작구 사당3동 180-1번지에 있는 남묘(400여㎡)는 재단법인 남묘유지사에 그 땅과 자료들을 불하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인근 주민들이 계를 조직하여 관리하거나 무속인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하나 효험이 별로 없어 무속인들조차 방치된 곳이 많아져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정부의 재산과 무관한 시설의 경우는 모르지만 정부의 문화재나 민속자료로 등록이 된 경우 또는 그 땅이나 건물이 정부의 재산으로 되어 있어 함부로 처리가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일괄적으로 조사를 해서 특별히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경우 필요로 하는 민간인들에게 불하를 하고, 주요 민속문화재는 민속박물관이나 어느 한 곳으로 모아서 제대로 관리를 하는 등 어떤 획기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곧 마지막 (4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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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10 [16:0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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