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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제사의 역사적 사례 검토 (3부)
 
박선식 한국인문과학예술교육원 대표 기사입력  2012/12/12 [16:34]
Ⅳ. 치우제사의 역사적 사례 검토
-한국 내 비전역사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앞서 말했듯이 『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보면, 치우를 제사했다는 단군의 행적이 거론되고 있다. 해당 시기는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년 만에 알유의 난이 있었다’는 내용이 단서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단군왕검이 즉위한 지 40여년 지난 시기에 단군 곧 단군왕검은 네 아들의 하나였던 부여를 시켜 알유(猰貐)의 세력을 토벌케 하였다. 

그리고 신지씨(神誌氏)와 치우씨(蚩尤氏) 그리고 고시씨(高矢氏)의 사당을 각기 다른 곳에 따로 마련하고 해당 제사를 올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의 사당이 한 곳이 아닌 점은 각기 존숭의 대상이 지닌 성격에 따라 그 상징성을 부각하고자 구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른 제사 행위 역시 별도로 추진된 점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단군왕검 때의 주요 선현에 대한 사당 건축과 제의행위는 알유라고 하는 구체적 주적 세력의 존재에 따른 백성의 일치단결과 문화적 자존감의 부각을 꾀한 측면으로 이해된다.

이어 고려 후기의 이암의 소작으로 전해지는 「단군세기」의 ‘16세 단군 위나(尉那)’부분의 내용이 주목된다. 이 부분은 너무 중요하여 단락별로 구분하여 검토코자 한다.
ㄱ) 무술 28년 구환(九桓)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三神)과 상제에게 제사지냈다.
ㄴ)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ㄷ)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ㄹ) 한 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환(愛桓)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ㅁ) 애환(愛桓)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ㅂ) 애환의 노래는 일컫길, 
산에 꽃이 있다네. 산에 꽃이 있다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다네.
不咸 땅에 봄이 오면 꽃은 흐드러지게 붉어지네.
하늘과 감(神)을 섬기고 큰 평안함을 즐긴다네.

㈀ 단락의 내용을 통해 여러 존위들을 제사지내는 장소가 한 곳으로 통일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단락의 내용을 통해 제사대상의 존위가 구체적으로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단락의 내용을 통해
① 연회가 이루어졌고,
② 연회가 밤까지 이어졌으며,
③ 경을 외우는 학술과 교육의 분위기가 존재했고,
④ 마당밟기(踏庭)라는 구체적인 집단놀이가 펼쳐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단락의 내용을 통해 연회의 놀이는 둥글게 펼쳐지는 모습을 띄었고, 춤을 추며 애환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단군세기」의 ‘16세 단군 위나’부분의 내용을 통해, 아주 오래 전 상고 시기의 축제 모습을 마치 사진을 보듯이 추정할 수 있다. 마치 종합 축제라도 벌인 듯한 분위기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 같은 축제적 제사행위가 이루어진 데는 앞서의 15세 단군 대음 때의 홍수 발생에 따른 민생의 피폐함과 금철(金鐵)과 고유(膏油) 등의 물자조달에 따른 인력의 고통과 연관지어 볼 여지를 느낀다. 홍수 발생은 당연히 이재민 등의 구호사업 등의 후속대책을 필요로 했을 터인데, 이후 벌어진 금철과 고유 등의 물자조달은 무슨 이유에서 벌어진 것인지 추정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이전의 15세 단군 시절에 앞서 벌어진 홍수 발생에 따른 복구사업용 물자였는지 알 수 없다.  

16세 단군 위나가 종합적인 제사행사를 추진한 데는 그 같은 사회의 어수선함과 함께 자신이 왕실의 적장자가 아닌 牛加 출신의 관료란 점과도 연관되는 듯이 여겨진다. 추정컨대 위나 단군은 백성들을 위무함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민족적인 존경의 상징적 인물들을 모두 한꺼번에 제사로 봉행하는 행사를 추진하고, 그에 따른 자연스런 통치력의 장악을 꾀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당시의 종합 제전은 그러한 정치적 의도와 맞물린 종합적 문화행사였다고 헤아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모습이 과연 실제 상황이었느냐이다. 달리 말해, 위서시비 속에 휩싸인 「단군세기」의 서지학적 검토에 아직도 시빗거리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앞서 거론했듯이 오늘날 고구려 유적지의 하나로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존재하고, 그 위나암성은 고고학적으로 고대 시기나 그 이전까지 소급될 개연성을 지닌 곳이다. 

특히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21년의 3월에 교시(郊豕)를 놓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희생을 맡아보는 설지(薛支)가 그 제사용 돼지를 쫓아 잡은 곳이 다름 아닌 국내위나암이었다는 기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필 제사에 쓸 희생인 돼지가 달아난 곳이 어째서 위나암인가 하는 점이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를 일이니 희생을 담당하던 관리인 설지의 의도된 행위였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은 희생용 돼지를 되찾아 돌아온 설지가 국왕인 유리왕에게 “신이 교시를 쫓아 국내위나암에 이르러 그 산수의 깊고 험한 형세를 보니 땅이 오곡을 심기에 마땅하고, 또한 미록(糜鹿)과 어별(魚鼈)의 생산이 많음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면 곧 백성들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가히 전쟁의 환란을 면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설지는 보고에서 위나암의 땅이 나라를 다스리는 소중한 터전임을 확신에 가득 차 밝히고 있다. 희생을 담당한 설지의 그 같은 설명은 위나암이 지니고 있는 인문지리적 이점은 물론, 전통적으로 그 곳이 유서 깊은 선조들의 땅임을 미리 살핀 결과가 아닐까 싶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군세기」의 ‘16세 단군 위나’가 치루었다는 치우를 포함한 선현들의 제사가 이루어진 이른바 영고탑의 지명과 고구려 유적지로서 현존하고 있는 위나암성의 동일성 여부이다. 추정컨대 영고탑이란 지역명과 오늘날의 위나암성이 꼭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단군 위나의 역사적 전통이 뒷날 고구려의 시기에 재조명되어 지역명으로 정착됐을 가능성도 제기해볼 수 있다. 

▲ 사학계에서 위나암성이라고 밝힌 지금의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다음으로 살필 점은 안함로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삼성기전 상』의 서술 태도와 신라에서의 치우관념이다. 안함로는 ‘安弘’이란 신라 승려로 추정되고도 있는데, 그가 지은 『삼성기전 상』에 분명히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안함로의 그 같은 역사적 견해는 치우의 행위에 위대성이 존재함을 드러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 덕흥리 벽화 안길 괴수도의 그림(중국 내 치우 묘사 형태와 비슷하다.)   
그런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열전 제일’에서 “신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호금천씨의 후예라고 이르는 까닭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는데, 김유신의 비석에도 또한 이르기를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의 영윤’이라 하였다.”는 내용을 밝혔다. 그 같은 점을 견주어 보면, 신라 당시의 사회 속에서는 치우나 헌원의 위상과 가치성이 서로 혼재되어 있었을 개연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신라의 진평왕대에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은 귀신부리의 우두머리인 비형랑을 빗대어 두두리, 곧 목랑이란 전혀 다른 별칭이 등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보면, 대무신왕의 별칭이 ‘대해주류왕’이라고 한 점이나, 주몽의 또 다른 이름이 ‘추모(鄒牟)’인 점을 밝히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신통력을 지닌 예언가였던 추남, 그리고 통구의 사신총 널길부분에 그려진 수문장(역사)의 모습이나 덕흥리 벽화 안길 괴수도의 그림 등을 볼 때, 고구려시기에 충분히 치우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덕흥리 벽화 안길 괴수도의 그림을 보면 중국 지역에서 흔히 보게 되는 치우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치우라고 단언할 만한 자료는 없다고 해야 솔직한 견해일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시기에 치우에 대한 존숭의 예우와 그에 따른 제사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펼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주류’나 ‘추(鄒)’, ‘추(楸)’ 등의 음운적 현상을 미루어 치우와의 희미한 연관성을 조심스럽게 추찰하는 데 그친다.
 
▲ 통구 사신총 널길부분의 수문장 그림     © 편집부


 곧 마지막 (4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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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12 [16:3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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