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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의 자격이 없는 관우를 모시는 동묘 (1/4부)
정사 <삼국지>의 내용에서 과장 각색된 소설 <삼국연의>
 
편집부 기사입력  2013/02/08 [16:25]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전철역인 ‘동묘(東廟)’ 역에는 이상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보물 제142호인 동묘라는 건물인데, 동묘 전철역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동묘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하고 물으면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인근에서 장사를 오래한 사람들만이 동묘가 누구의 사당인지 알고 있을 뿐이다.

사당 묘(廟)자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분명 동묘는 누군가를 모신 사당임에는 틀림없다. 동묘는 과연 누구의 사당일까? 동묘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인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혹자는 왜 중국 장수인 관우의 사당이 서울에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듯이, 동묘는 약소국가인 속국(屬國)의 비애가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 약소국가인 속국의 비애가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 동묘의 위치도     © 편집부

아래 글은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민족사문화콘텐츠과 한재규 교수의 저서 “귀신이여 이제 대로를 활보하라”중에서 인용한 글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아픈 우리역사의 한 단면을 제대로 지적한 글이다.

없어져야 할 서울의 동묘(東廟)

서울의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에 단기 3953년(1620년)에 창건한 동묘(東廟)가 있다. 이 동묘는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줄인 말로 곧 관우의 무묘(武廟)이다. 관우란 나관중이 쓴 <삼국연의>라는 소설의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촉(蜀)나라 장수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연의>란 책은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소설이다.

지나인들의 특이한 재능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침소봉대(針小棒大)이다. 곧 바늘만한 것을 몽둥이만한 것으로 과장 표현하는 것이다. 엄연한 정사(正史)에서의 인물도 그들 특유의 춘추필법으로 왜곡.날조하는데, 소설에서 그 인물을 과장하는 것 쯤이야 아마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을 것이다.

명나라 황제 신종이 조선에 관우의 사당을 짓기 위해 내탕금 4,000냥과 '현령 소덕왕 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고 쓴 친필 액자를 보내왔다. 그때 만세덕이라는 자가 와서 관왕묘를 지은 것이 바로 지금의 동묘이다. 그 무렵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인데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은 터라 반대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 뒤부터 무과 급제자와 출정하는 무관들에게까지 의무적으로 관왕묘를 참배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관왕신앙이 번져 북관묘와 남관묘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곧 그 무렵 소중화를 자처했던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관왕 모시기를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교를 신봉했던 그 무렵 사대부들이 도교의 관왕에게 참배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철저한 존화 사대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지배계층이었던 그들은 영원한 지나의 주구가 되기 위해 유교.도교의 합작 종교도 마다하지 않고 그 종교인이 될 것을 자처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서울 한복판의 도심지에 동묘가 버젓이 남아 있는 것도 결국 지난날 지나를 종주국으로 떠받들었던 사대주의 사상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나족이 오히려 우리를 종주국으로 떠받들면서 우리의 조상신 모시기를 극진히 했다.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한(漢)나라의 시조 유방은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항상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그 뒤 한나라를 세우고는 치우천왕의 사당까지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유방이 치우천왕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했다는 것은 곧 그 무렵의 지나인들이 치우천왕을 군신(軍神)으로 추앙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유방과 함께 진(秦)나라를 멸망시켰던 항우(項羽)와 동묘의 주인공 관우(關羽)가 치우(蚩尤)의 뒷자와 동음이자(同音異字)라는 것을 볼 때, 항우와 나관중 역시 치우를 존경하여 그 이름을 본 뜬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치우천왕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나와 있듯이 병주(兵主)와 만고의 무신(武神)으로 또 용강(勇强)의 조상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현재 서울에는 치우천왕을 모신 사당이 없다. 그리고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사당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한낱 소설 속에서 무공이 과장된 인물에 불과한 관우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사당 안에 버젓이 좌정하고 있다. 관우는 치우천왕에 비교하면 그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촉나라의 일개 장수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일천한 신분으로 치우천왕의 직계 후손인 우리 앞에 감히 무신을 자처하며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지나의 역대 사서를 통틀어도 치우천왕에 비견할 만한 장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정작 모셔야 할 우리의 군신은 배척하고 지나 소설 속에서 과장된 인물을 군신으로 모시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의식 수준이 아직도 조선시대의 그 굴종적이었던 지나의 종교 종속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묘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과 같이 진작에 해체되었어야 할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백해무익한 구시대의 유물이다. (인용 끝)

이렇듯 동묘는 명나라에 의해 강압적으로 세워져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건물이다. 관우는 역사상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군신(軍神)으로 추앙될 만큼의 무공은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그의 무공이 과대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명나라는 소설 속의 엉터리 무공을 근거로 조선에 치우대신 관우를 군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 평범한 장수를 소설 속의 군신으로 승격시켜 그 상을 모시고 있는 동묘의 전경     
▲ 동묘에 군신으로 모셔져 있는 촉나라의 장수 관우의 상. 관우는 진짜 군신일까?   

관우는 군신의 자격이 없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씌어 있는 관우의 무공은 다음과 같은데, 청색은 정사 <삼국지>의 기록으로 내용이 서로 다르다.
*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벤다. --> 화웅은 손책에게 죽는다 
* 관도대전에서 안량 문추의 목을 단 칼에 벤다. --> 문추는 조조군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 주군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오관(五關)의 장수의 목을 차례로 벤다. --> 그런 내용 없다
* 적벽대전에서 군율을 어기면서도 신세를 진 조조의 목숨을 살려준다  --> 그런 내용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연의>의 내용과는 달리 <삼국지>에는 관우의 무공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연의>에는 관우를 그토록 의리가 있고 은혜를 알며 엄청난 무공을 세운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관우는 군신으로 추앙될 정도의 장수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관우는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몽이란 장수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려 그 목이 조조에게 보내진 패장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해 그것도 사로잡혀 목이 잘린 장수를 군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우는 철저히 명나라에 의해 <삼국연의>로 과장된 장수일 뿐이다. 명나라는 <삼국연의>라는 엉터리 역사소설을 지어 놓고 군신 같지도 않은 관우를 군신으로 모시도록 강요한 것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오나라의 사령관인 여몽과 부사령관인 손호가 얼마 후에 갑작스럽게 죽고, 관우의 목을 본 조조까지 이듬해 66세의 나이로 죽자, 사람들은 관우의 원혼이 저주했기 때문으로 생각하여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관우의 영혼을 달랬다. 황제도 왕도 아니었던 관우를 제(帝)로 받들어 제사를 받드는 것은 백성들의 동정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관우의 죽음에 대해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관우는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인물이었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의했을 때 관우는 크게 노하여 손권의 사자를 꾸짖고 창피를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한다.

원래 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강릉에 있었던 촉한의 태수인 미방과 부사인 등은 관우에게 무시를 당해 항시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군수물자의 조달에 비협조적이었다. 이에 대해 관우는 “개선해 치죄하겠노라”하고 일단 전선으로 떠나간다. 결국 그들은 오나라가 강릉을 공략하자 촉한을 배반하게 된다.

손권이 사돈이 되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 수 없다"며 거절해 손권을 격노케 한 것은 외교의 실수이고, 자기 부하에게 불만이나 공포심을 가지게 한 것은 내정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관우는 자신의 죽음을 자기 자신이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형주에 남겨 놓고 성도로 돌아올 때 관우에게 앞으로 취할 기본 전략을 지시하였다. “동쪽으로 손권과 화친하고, 북쪽으로 조조를 막아야 한다.”이런 제갈량의 지시를 지켰다면 관우는 오나라 여몽에게 잡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관우의 성격적인 결함과 상사의 지시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렇듯 성격적인 결함에다 상사의 지시도 무시하면서 전투에서 패해 사로잡혀 목이 잘린 장수인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떠받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는 이러한 관우의 치부를 감추고 그를 마치 천하무적인 전쟁의 영웅인 것처럼 묘사해 버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관우를 아주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로 알고 있다.

여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관우가 실제로는 미인을 무척 탐했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보면,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인 10명을 관우에게 보낸다. 그러나 관우는 이 미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오직 인질로 잡힌 유비의 두 부인을 섬기는데 전념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촉서와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와 유비가 여포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하비성으로 갈 때, 관우는 상대 장수의 부인인 두(杜)씨가 천하절색이란 소문을 듣고는 “자신이 성을 함락시키면 그 여자를 달라”고 조조에게 간청했다고 적혀 있다. 조조는 흔쾌히 관우의 청을 응낙했으나, 성의 함락 후 실제로 경국지색인 두씨를 보고는 마음이 바뀌어 관우와의 약속을 깨고 자신의 첩으로 삼아 버린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관우는 이후 조조를 죽이려고 하는 등 조조와 심한 갈등을 겪는다. 관우가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송대와 원대의 구비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우를 군신으로 모신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훼괴한 일이다. 여하튼 명나라는 <삼국연의>라는 소설 속에서 관우의 무공을 부풀려 놓고는 관우를 군신으로 떠받든다. 그리고는 관우의 사당을 조선의 한양에도 세우게 하고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국왕을 비롯한 대신들과 백성들에게도 참배를 강요한다.

참으로 일관성 있고 집요하게 명나라는 역사왜곡을 한다. 여하튼 이런 관우가 후대에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받게 된 것은 명나라의 정치적 필요와 민간의 심리적 기대감으로 인한 '영웅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중국인들이 동이의 대륙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과대포장한 허구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가 한국인의 교양필독서로 읽히고 있는 이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 관우의 목무덤이 있는 낙양 관림(關林)    
▲ 관우의 몸무덤이 있는 호북성 당양의 관릉    

명나라는 조선에게 관우를 군신으로 섬기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1598) 5월 13일자의 기록을 보면, “오늘은 관왕(關王)의 생신이다. 소상(塑像)과 제구를 갖추어 치제하였는데, 상도 행행하여 치제하도록 요청했다. 이 관왕묘는 중국에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그 의식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리(명나라 관리)가 강요하므로 상이 할 수 없이 가서 분향(焚香)하려고 대가(大駕)를 차비하였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행행을 중지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속국인 조선을 왜적으로부터 구해주었으니 마땅히 관왕묘에 치제하도록 명나라의 관리가 압력을 넣어 역사상 전무한 일을 어쩔 수 없이 강행하려 한 것인데 하늘도 통곡을 하였는지 비가 내려 행사를 못하였다는 기사이다. 선조는 그 다음날 마지못해 관왕묘에 치제를 하였다.

선조가 재위 초기인 선조2년(1569년)에 당대의 석학인 기대승으로부터 <삼국지연의>는 무뢰한 자들이 잡된 말을 지어 만든 것으로 적벽(赤壁)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괴상하고 황탄한 일과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이며 마땅히 군주는 이러한 서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30년이 채 되지 않아 명나라의 강요에 의하여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패장인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떠받들고 치제를 하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묘를 없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비록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라 동묘에도 제사를 올리면서, 조상이며 진정한 군신(軍神)인 치우천왕에게도 제사를 올렸다. 그 제사의 이름은 둑제(纛祭)로 둑소제(纛所祭)의 준말로 일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고 그리고 무장(武將)들이 임지로 떠가기 전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도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인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의 특명으로 단군을 신화하하고, 우리 삼국의 역사를 반도내로 몰아넣었고, 민족의 혼을 자르기 위해 많은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뚝섬에 있던 치우천자의 사당인 둑신묘(纛神廟 또는 纛神祠)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치우천왕의 사당을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는 말을 키우는 장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뚝섬 경마장이 들어서게 된다. 일제의 이런 짓은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집어넣고, 남산 국사당자리에 식물원을 만들고, 경희궁을 학교로 사용하는 것과 다 일맥상통하는 행위이다. 다 민족정기를 끊자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묘는 없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묘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부적과 같기 때문에 일제가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대로 놔두는 것이 우리의 민족정신을 없애는 길이기 때문이다.
 

곧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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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08 [16:2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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