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후조선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요(거란)와 금(여진)나라가 중국의 역사가 아닌 이유
거란족과 여진족은 고구려와 같은 민족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8/05 [12:04]
5천년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통일국가는 한·송·명 세 나라로 이들의 존속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천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즉 중국 역사의 대부분이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왜 수·당나라가 포함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비록 수·당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으나 한족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수·당의 왕실이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봄으로서 과연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중국의 역사인지 우리와 동족의 역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통일국가 송나라(960~1279)의 역사
 

통일국가였던 당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5대10국 시대가 된다. 그 중 5대 최후의 왕조였던 후주(後周)의 근위대장군이었던 조광윤이 왕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세운다.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이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송나라의 북방 요나라와 서쪽 위구르에 탕구트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가 통일국가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은 당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04년 북쪽에 있던 요나라가 공격하자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굴욕적인 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개조이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상대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또한 송나라는 서쪽 탕구트족이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공격하자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
는다. 
▲ 강화도 마니산 개천각에는 환인, 환웅, 치우, 단군 등 우리민족사의 조상 24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그중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편집부
  
여진족은 처음에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이라 했다. 송 휘종은 종전에 요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금나라로 보내면서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자, 금나라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1126년 멸망시킨다. 당시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했다. 워낙 전투력이 없었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자 금나라가 분노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다. 그러자 송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떠넘긴다. 휘종은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 군대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약조가 잘 지켜지지 않자 다시금 금나라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126년 11월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만다. 금나라는 송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무릎을 꿇리고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라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 금나라에게 치욕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 편집부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고종이다. 1127년 금나라에게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를 남송으로 구분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아비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지위에 올라있던 터라 형인 흠종은 포로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친다.
 
남송은 장군 악비의 선전으로 한때 금나라를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으나 힘이 부친 남송은 전쟁 대신 강화를 간절히 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강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금나라의 강압에 남송의 진회는 악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린다. 악비가 죽고 얼마 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조건이 남송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할 것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할 것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칠 것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할 것
이로써 남송은 생명을 140여년 더 연장하지만, 결국 금·송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요나라의 1차 침입과 서희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을 무너뜨린 요나라는 2대 황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 들어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연의 맹’의 대가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하여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 때 고려를 3차례나 공격했다. 993년 1차 침입 때 요나라 장수 소손녕에게 고려군의 선봉이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파와 땅을 분할하여 요나라에게 주자는 파로 갈리게 된다. 그러자 서희가 항복이나 땅을 주는 것은 만고의 치욕이라고 하면서 먼저 자신이 나서 일전을 겨룬 후로 그 결정을 미루어달라고 하고는 요나라 진영으로 달려갔다.
 
▲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요를 철군시키고 강동6주까지 반환받는다.     © 편집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에게 상견의 예를 청하자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는 당장 뜰에 엎드려 절을 올려라”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양국의 대신 간에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高句麗 땅은 우리가 다 소유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땅을 침식하는 것이며, 또 너희 나라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해(海)를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너희 고려가 땅을 분할하여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뒤를 이었기에 국호도 고려이며 도읍지도 평양에 정한 것이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 준다면 어찌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서희의 논리가 정연하고 강경하여 소손녕은 더 이상 강압이 불가함을 알고, 군대를 돌릴 것을 결정하고는 연회를 베풀어 서희를 위로한 후 돌려보냈고, 강동 6주까지 반환받게 된다.
 
이렇듯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는 高句麗의 정통성을 누가 가졌느냐를 놓고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요나라의 역사가 어찌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진국의 오성장군 겸 요왕에 봉해진 야율아보기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을 내부쿠데타로 무너뜨리고는 高句麗와 대진국(발해)의 황족과 대신들을 중용해 국가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문헌 참조)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138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요나라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돌아간다. 막강했던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와 군사를 잃고는 국력이 약해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승전파티를 송의 수도 개봉에서 연다.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고려는 하남성 개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고, 아마 송이 고려의 속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 고려가 송나라 수도에서 요나라와의 전쟁승리를 축하하는 승전파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 편집부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으리오!
 
(원본 기사)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226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3/08/05 [12:04]  최종편집: ⓒ greatcorea.kr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