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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 232년 존속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 (3부)
낙랑국과 낙랑군은 동시에 존재한 적이 없다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1/20 [09:56]
 
우리 역사에 낙랑국(樂浪國)이라는 나라가 엄연히 등장함에도 대한민국 식민사학계는 낙랑국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낙랑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대동강 평양에 위치한 한사군의 낙랑군(樂浪郡)으로 보는 아주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니 그들로부터 역사를 배운 대부분 사람들은 고구리 호동왕자와의 사랑 때문에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를 한사군 낙랑군태수의 공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반면에 북한 사학계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엄연히 구별하고 있어 남·북간에 서로 사관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북한사학계는 한나라 군현인 낙랑군은 중국 북경 부근을 흐르는 대릉하(패수) 동쪽에서부터 요하(열수) 서쪽의 넓은 지역이며 왕검성은 요하 하류에 있는 개현으로 보고 있으며, 낙랑군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낙랑국의 위치를 대동강 평양 근처라고 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커튼 뒤에 감쳐진 나라 낙랑국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 (좌) 북한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국과 낙랑군 (우) 남한사학계의 주장에는 낙랑국이 없고 낙랑군 뿐.
 
 
1. 조선의 일원이었던 낙랑국
 
우리의 역사강역 안에 낙랑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 땅에 있던 소국 낙랑국은 고구리 대무신왕의 왕자인 호동과의 사랑을 위해 자국의 자명고를 찢는 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그런 낙랑이 처음으로 우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단군세기>이며, 최씨의 낙랑국이 언급되는 기록은 <태백일사 북부여기>이다. 
 
① <단군세기> 13세 흘달 단군 “16년 갑오(B.C1767)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낙랑은 조선에 속해있던 일개 제후와 같아 보인다.
 
② <단군세기> 23세 아흘 단군 “원년 갑신(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하여 낙랑골(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낙랑은 조선의 아주 중요한 지역의 제후국이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황숙 고불가는 24세 연나 단군 때 섭정을 맡을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 한반도의 낙랑이 섬서성까지 갈 수 없다. 당시 낙랑이 가깝게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 편집부
 

③ <북부여기 상>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 조에 “45년 병오년(B.C195) 겨울 낙랑의 왕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해(海)를 건너 마한의 도읍인 왕검성에 이르렀다”와 3세 고해사 단군 조에 “원년 임신년(B.C169) 정월 낙랑의 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海城)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위 3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에게는 조공을 바치던 낙랑이라는 제후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최숭의 낙랑국이 대를 이어 고구리 대무신왕 20년(A.D37) 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멸망 당시의 낙랑국왕 최리는 <북부여기>에 기록된 최숭의 후손이므로, 최씨의 낙랑국은 최소 232년간 굳건히 존재했던 엄연한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낙랑국은 번조선과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으나 마조선(마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번조선(번한)을 빼앗아 다스린 위만·우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였다. 따라서 한사군전쟁과도 직접 관련이 없었기에 <사기>에 언급한 5명의 제후에게 나눠준 땅의 이름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고가 쓴 <한서>의 내용대로 전한 때부터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의로 역사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오는 낙랑은?
 
① <신라본기>에 기록된 낙랑은?  
◇ 시조 박혁거세 30년(B.C28) 낙랑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했다가 도둑질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돌아갔다.
◇ 남해차차웅 원년(4)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11년(14) 낙랑은 우리의 내부가 비었으리라 생각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했다.
◇ 유리이사금 13년(36) 낙랑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타산성이 함락되었다. 14년(37) 고구리 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없애니 그 나라사람 5000명이 와서 의탁하므로 육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위 기록에 나오는 낙랑은 같은 것으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닌 우리의 낙랑국으로 보인다. 현재 사학계의 이론으로는 평양에 있는 낙랑군이 경주에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나, 위 기록의 낙랑은 ‘그 나라사람(其國人)’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고구리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최리의 낙랑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산서성 임분에 있는 신라의 초기도읍지 금성     © 편집부
 
 
② <백제본기>에 기록된 낙랑은?
◇ 시조 온조왕 8년(B.C10) 가을 7월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중략) 이로 인해 낙랑과의 평화가 깨졌다.
◇11년(B.C7)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울짱을 습격하여 쳐부수게 하고 100명을 죽였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의 두 울짱을 세워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 17년(B.C1) 봄 낙랑이 내침하여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 18년(A.D1) 겨울 11월 왕은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해 구곡에 당도하였으나 큰 눈을 만나 바로 돌아왔다.
 
백제의 온조대왕 B.C 10년 기록에 나오는 낙랑은 낙랑태수라는 표현으로 보아 한사군의 낙랑군 태수로 오인할 수도 있으나, 태수란 직책은 중국 고유의 관직이 아니라 고구리도 같이 사용했던 벼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1976년 북한에서 발견된 덕흥리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13태수의 관직명에서 명확하게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백제와 낙랑이 B.C 10년 이전까지 평화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또한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을 습격하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분명 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사군 낙랑군은 동이족인 말갈족에게 백제를 습격하게 할 시킬 정도로 그렇게 잘 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은 같은 민족끼리의 사랑이다. 사랑을 위해 자명고를 찢는 낙랑공주  (옛 영화)
 
 
위의 기록을 종합하면 낙랑국은 조선의 낙랑홀에 있던 나라로 B.C 195년 낙랑 왕 최숭(崔崇)에 의해 세워져 존속되다가 A.D 37년 마지막 임금 최리(崔理) 때 낙랑공주에 의해 자명고가 찢어지면서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하기까지 232년 동안 존속했던 우리민족의 역사로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삼국의 초기까지 한사군의 낙랑군이라는 식민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민족의 역사인 낙랑국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낙랑국을 식민지 낙랑군으로 변조시킨 반고의 <한서> 기록의 낙랑군은 의도적으로 역사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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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1/20 [09:56]  최종편집: ⓒ greatcorea.kr
 
죄송 ㅎㅎ 14/01/20 [20:30] 수정 삭제
  첫째사진의 왼쪽그림은 최태영.이병도공저의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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