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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고 채로 공을 쳐 문에 넣는 격구(擊毬)
 
김민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2/02 [16:06]
 
1392년 9월 26일 태조가 내정에서 편을 갈라 말을 타고 나무 채나 막대기 구장(毬杖)으로 작은 공을 쳐서 구문(毬門)에 공을 넣는 놀이인 격구(擊毬)를 하였다. 11월 9일 내정에서 격구를 하였는데 류만수·정희계 등이 참예하였다.
 
1398년 5월 18일 태조가 흥천사에 거둥하여 사리전을 건축할 기지를 시찰하고 감역제조 김주에게 일렀다. “정릉과 요물고를 빨리 만들 필요는 없으며, 이 사리전은 건축을 원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후일에 이를 저지시킬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마땅히 빨리 성취하여 나의 원망에 보답하라.” 드디어 궁궐에 돌아와서 류만수·도흥·류운 등과 더불어 격구를 하였다.
 
1399년 1월 9일 정종이 경연에 나아가 강관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병이 있어 수족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를 하여 몸을 움직여서 기운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하니 지경연사 조박이 말하기를 “기운을 통하게 하는 놀이라면 그만두시라 할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환시나 간사한 소인의 무리와는 함께 하지 마소서.”고 하니 정종이 그렇게 여겼다. 내정에서 격구를 하였는데 전 참지문하부사 도흥·전 중추원부사 류운과 종친이 모시었다.
 
▲ 궁중에서 격구하는 모습     © 편집부

    
1월 19일 논어의 절요를 읽어 마치니, 조박이 아뢰었다. “논어 한 책은 모두 성인의 말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숙독 완미하여 성인을 본받으시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사온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옛날에 송나라 정승 조보가 평일에 읽던 글이 오직 한 질뿐이어서 사람들이 볼 수가 없었는데 죽은 뒤에야 논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근자에 전하께서 항상 격구를 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시는데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가지는 것이 크니 경각 사이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할 수 없거든 하물며 유희이겠습니까?”
 
3월 13일 대사헌에게 격구하는 까닭을 말하였는데 정종이 조박에게 이르기를 “과인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잠저 때부터 밤이면 마음속으로 번민하여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숙부와 형제들이 게으르다고 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품어서 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근자에 다시 병이 생겨서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하며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 또 내가 무관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으로 격구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하니 조박이 그저 ‘예, 예’만 하였다.
 
1401년 11월 24일 승추부에서 부병(府兵)과 수전패(受田牌)를 구정(毬庭)에 모았으니, 명령을 받고 노소강약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1411년 윤 12월 10일 태종이 상왕을 받들고 내전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격구하고 극진히 즐기었는데 종친이 참여하였다. 상왕의 어가가 돌아가니, 태종이 돈화문 안 돌다리까지 전송하고 꿇어앉아, “양친이 다 돌아가셨으니, 이제 효도하고 봉양할 데가 상왕을 제쳐놓고 누구이겠습니까?”하니, 상왕 정종이 말하였다. “그렇도다.”    
 
▲ <무예보통지>에 그려진 격구하는 모습     © 편집부
 
 
1412년 3월 19일 태종이 상왕을 해온정에 받들어 맞아 연향을 베풀었는데 극진히 즐기다가 곧 파하였다. 태종이 상왕을 전송하여 돈화문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와 중문에 이르러 시신을 돌아보며 “정안군이 영안군을 맞는 것이 어떠한가? 예전의 제왕이 어찌 이러한 이가 없었겠느냐?”하였다. 이 앞서 태종이 상왕을 받들어 제군과 더불어 격구를 하였는데 제군이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례대로 사장을 내어 저화 2백 장을 의정부에 바치었는데 예빈시로 하여금 판비하게 하였다.
 
4월 1일 태종이 상왕을 광연루에 봉영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니, 모란을 감상하고 또 타구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극진히 즐기다가 밤에 파하였다. 충녕군과 지신사 김여지에게 명하여 상왕을 호종하여 대궐에 돌아가게 하니 상왕이 충녕군에게 각궁을 김여지에게 면포 옷을 내려주었다. 11월 1일 태종이 인덕궁에 나아갔는데, 상왕이 잔치를 베풀고 청했기 때문이다. 격구하며 함께 즐기다가 밤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1413년 7월 13일 태종이 상왕을 받들고 광연루 아래에서 격구하였다. 태종이 창덕궁에 거둥하여 효령대군과 김여지에게 명하여 상왕을 청하고 병조판서 이숙번을 불러 술을 돌리게 하고 이숙번에게 구마(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상왕도 또한 이숙번에게 사의(紗衣)를 내려 주었다. 해가 저물 즈음에 파하였다.
 
1417년 4월 20일 태종이 상왕을 받들고 광연루에서 잔치를 베푸니, 종친이 시연하였다. 이 앞서 임금이 육조에 하교하기를, “근일에 인덕궁으로 나아갔더니 상왕께서 말씀하기를, ‘나에게 금년·내년에 액이 있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서로 자주 만나기를 원한다.’ 하셨는데, 지금 모란꽃도 활짝 피었으니 좋은 때를 헛되게 저버릴 수가 없다. 지난번에 내가 상왕전에 나아가 혹은 격구하면서 놀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격구놀이를 치우고 단지 술자리만 마련하여 꽃이나 관상함으로써 상왕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는데, 경들은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는가?”하니, 이조판서 박신이 진언하였다. “주상께서 상왕을 받들고 함께 즐기신다면 대소 신료가 기뻐하지 않을 자 없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번거롭다고 하겠습니까?”
 
1425년 4월 19일 병조에서 계하기를, “삼가 예전 제도를 상고하오니 한나라의 축국(蹴蘜)과 당나라의 격환(擊丸)은 그것이 황제(黃帝)의 축국하던 옛 제도로서, 그렇게 하는 까닭은 모두가 유희를 이용하여 전투를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려국 전성시대의 격구 유희는 대개 그것을 모방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격구를 잘 하는 자는 말을 타고 활을 쏠 수도 있으며, 창 쓰고 칼 쓰기도 능할 수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무과 시취거나 춘추도목시험에는 아울러 그 재주를 시험하여,
 
말 타기와 손 쓰는 것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세 번 갖추어 능히 공을 쳐서 구문으로 내보내는 자는 1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 쏘아 세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로 15점을 주고, 말과 손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세 번 갖추어 비록 공을 쳐서 공문으로 내보내지는 못하였더라도, 능히 행장을 치는 자는 2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에 두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 10점을 주고, 말과 손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두 번 갖추고 능히 공을 쳐서 공문으로 내보내는 자는 3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에 한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 5점을 주게 하며,
 
친히 시험하실 때에 1등으로 입격한 자는 도수 2백을 주고, 2등에 입격한 자는 도시험에 2등한 예에 의거하여 도수 1백 50을 주고, 3등에 입격한 자는 도시험 3등한 예에 의거하여 도수 1백을 주게 하고, 그 중에 이름 붙여 있는 곳이 없으나 숙련하기가 특이한 자는 상을 주도록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0일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병조의 공문서를 보니, 무과의 시취와 봄·가을의 도시에 모두 격구의 재주를 시험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졸들로 하여금 무예를 연습하게 하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격구 유희는 고려가 왕성하던 때에 시작된 것으로서,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갓 놀며 구경하는 실없는 유희의 도구가 되어, 호협한 풍습이 날로 성하여졌으나, 국가에 도움됨이 있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의 축국 격환이 다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비록 전투를 익힌다고 하나, 다 유희하는 일이 될 뿐 만세 본보기가 될 만한 제도는 아닙니다. 선유(先儒) 주희(朱熹)도 또한 타구는 무익한 일이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과 태종 공정대왕께서 무예의 기술을 훈련시키는 데 갖추어 실시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일찍이 이 격구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무익하다고 생각되어 실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나라는 무예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이미 기사와 창 쓰는 법이 있으니, 어찌 격구의 유희를 하여야만 도움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법은 다만 지금에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격구의 법을 정지하여 장래의 폐단을 막으소서.”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나는 격구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하니, 지사간 고약해가 대답하기를, “신 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성명하신 이때에는 비록 폐단이 있기에 이르지 않으나, 뒷세상에 혹시나 어리석은 임금이 나서 오로지 이 일만을 힘쓰는 이가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이어 옛 시 한 구절을 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때에 처음 시작하여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 있었던 것이니, 저들이 어찌 폐단을 알지 못하고 하였겠는가. 다만 무예를 익히고자 하였을 뿐이다. 고려국의 말기에도 또한 이 일을 시행하였으나, 그들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 어찌 격구의 탓이겠는가. 내가 이것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군사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격구하는 곳이 성밖에 있으니,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하였다.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의 관원들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잠저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참으로 말 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태종 때에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유고하여서 실행하지 못하였다.”하였다. 좌부대언 김자가 대답하기를, “고려국의 말기에 모여서 격구를 보았으므로 인하여 음란한 풍습이 있었습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이 시대에는 비록 격구를 보지 않으나, 어찌 음란한 여자가 없겠는가.”하였다. 
 
▲ 궁중에서 하던 격구를 재현한 모습     © 편집부
 
  
1430년 9월 21일 세종이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격구하는 것을 조정 신하들이 고려조의 폐해를 들어 폐지를 청한 자가 많았으나, 그러나 격구는 본시 무예를 연습하기 위함이요,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의 일을 상고하여 보아도 이러한 일들이 자못 많은데, 이는 모두 무예를 습득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내가 비록 친히 이를 치지는 않았으나, 그 치는 이치를 고구하여 보건대, 말을 잘 타는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고, 그 달리는 재능에 있어서도 반드시 기사보다 갑절이나 능해야만 칠 수 있기 때문에, 무예를 연습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고려국의 전성기에도 또한 무예를 연습하기 위해 하였던 것인데, 단지 그 말기에 이르러서 드디어 희사로 일변하여, 그 복장에 따른 장식과 안장 갖춘 말 등을 다투어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하였던 것이다.
 
저번에 고약해가 나에게 말하기를, ‘고려국 말기에는 군왕까지도 구를 희롱하는 폐단이 있었다. ’고 한 바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임금이 희롱하고 즐기는 것이란 비록 격구는 아니더라도 심지어 악공과 광대 등의 희롱을 즐겨하는 이도 있으니, 어찌 이만을 가지고 인주의 폐단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용심 여하에 있을 것이다.
 
격구하는 법을 육전에 실리기가 마땅치 않다면 등록에 기록하는 것이 어떤가. 뒤에 만약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니, 안숭선이 대답하기를, “격구는 무과의 삼장에 대비하기 위함인데, 육전에 실린다 해서 무엇이 불가하겠습니다.”하고, 모두 아뢰기를, “기록할 만합니다.”하매, 임금이, “그럴 것이다.”하였다.
 
11월 23일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총제 원윤과 훈련관제조가 함께 격구의 자세의 방법과 절차를 토의하였사온데, 공이 있는 곳에서 구문까지의 거리는 1백 보, 말을 세워 둔 곳에서 공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15여 보로 하고, 공을 치는 사람은 오른손으로 채를 잡는데, 채의 끝이 안으로 향하여 절반은 말의 목 위로 뒤치어 얹히고, 절반은 말의 목 왼쪽으로 내놓아 말을 달려 공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그러한 동작을 세 번 해 가지고 한 번 배지하고 말을 빨리 달리어 저쪽을 잡는데, 그 채의 끝이 안을 향하고 말의 가슴 앞에 닿게 하고, 자세를 세 번 갖춘 뒤에 바로 구문으로 쳐 내며, 채의 끝이 위로 향하면 말의 입과 가지런히 하여 채를 뽑아서 치고, 수양수로써 말을 달려 그 공을 따라가서, 채를 들고 머리 위로 휘둘러서 이를 치고, 드디어 수양수로 쳐서 구문으로 내어 보내고 그치며, 말을 돌려서 처음에 섰던 자리에 돌아옵니다. 그 말을 달리며 채를 잡는 자세는 처음 공을 내보낼 때와 같게 하옵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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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02 [16:0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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