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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 장충단을 짓밟은 이등박문의 망령 (3부)
박문사 건립에 경복궁 선원전, 경희궁 흥화문, 원구단 석고전 옮겨 사용
 
편집부 기사입력  2014/02/05 [09:49]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와 재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토오 히로부미의 공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려는 현창(顯彰) 움직임이 있었고, 이토오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안이 여러 번 나왔다. 그러나 공공장소에 이토오의 동상을 세울 경우 조선인의 반감을 사 언제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 대신 이토오 사망 20주년이던 1929년 말 동상보다는 이토오의 명복을 기원하는 불교 사찰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가 두 번째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정무총감인 고다마가 발의했다. 1930년 초 사찰 건립을 위한 ‘이토오공기념회'가 조직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친일파인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했다. 

사찰의 명칭은 기념회 조직 때부터 이토오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로 정해졌다. 사찰 이름 앞에 붙이는 산(山) 이름으로는 이토오의 아호인 춘묘(春畝)를 써서 정식 명칭은 ‘춘묘산 박문사'가 됐다. 박문사 종파는 이토오가 생전 귀의한 조동종(曹洞宗)으로 정해졌다. 

박문사 건립을 위한 기부금 목표액은 조선 20만 엔, 일본과 만주 15만 엔으로 총 35만 엔이었다가, 그 후 40만 엔으로 증액됐다. 총독부는 20만 엔 중 8만 엔을 조선 각도에 할당했다. 함경남도 관리들은 월급의 0.5~1%를 내야 하는 강제적인 모금이었다. 일본에선 미쓰이(三井) 같은 재벌이 거액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신청했다. 
 
▲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기원하기 위해 장충단(국립현충원) 자리에 세운 박문사                                © 편집부

 
박문사 후보지 선정

일제의 박문사 설치를 위한 준비는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그 후보지로 먼저 삼청동 안쪽이 우선 제기되었다. 두 번째 후보지는 사직단이었고, 3번째는 장충단의 전망대(物見臺), 4번째 후보지 역시 장충단이었는데 박문사가 세워진 바로 그 자리, 그리고 5번째는 당시 이토가 통감으로 근무하던 통감관저였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곳은 삼청동이었는데 그 곳은 경색과 풍광이 좋았으나 조선인 주거지가 있어서 곤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지형이 까다로운 점도 작용했다. 사직단은 조선인 주거가 밀집하고 영구보존해야 하는 [단]이 있었고 그것을 제외한 부지는 경관도 좋지 않아 곤란하다고 결론을 내었다. 

장충단은 건축물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천하고 남산을 배경으로 넓은 광장을 확보할 수 있고 자동차의 접근이 용이하여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당시 왜성관이 있던 총독관저 일대는 이토와 인연을 맺고 있지만 배후의 고지가 교통의 문제로 무리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결국 선정한 장충단의 박문사 위치는 본당을 북서쪽으로 향하게 하면 사원건축으로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전면에 2,000여 평의 광장을 얻을 수 있고, 전차와 자동차로 왕래하기에 완만하여 교통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선정의 마지막 단계로 당시의 일본 국수주의 건축학자 이토쥬타(伊藤忠太)에게 의뢰하여 당지를 선정하게 되었다. 이토쥬타는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설계했던 사람이다.
 
▲ 완공된 박문사 모습. 왼쪽이 정문인 경춘문(경희궁 홍화문) 박문사 오른쪽이 원구단의 석고전을 이전해 지은 종각      © 편집부
 
 
 박문사의 설계와 시공과정

설계에 들어가자 재미있는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순 한국식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본식과 현대식을 결합한 혼합식으로 했다. 조선에는 지진이 없으므로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고 한다. 본당 부지는 장충단 전차 종점에서 96척 높이에 위치하고 뒷 건물인 庫裡(쿠리)은 그보다 18척이 높다고 하였다. 가급적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앉히기로 했다. 또 남산의 조선신궁의 건축수법을 따르기로 하지만 계단을 가급적 줄이기로 했다. 

설계는 이등박문공기념회공영부에서 완성하였으나 공영부장은 총독부 학무국장 하야시(林茂樹)가 담당하였고, 책임자는 사사 케이이치(笹慶一), 고문으로는 이토쥬타(伊藤忠太)이었다. 공사는 오쿠라쿠미(大倉組)토목주식회사에서 낙찰받았고, 1931년 6월 5일에 공사에 착수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살해당한 23주기가 되는 1932년 10월 26일에 낙성식이 실시되었다.  

박문사는 약 42,000평 부지에 본당은 조선식을 가미한 철근 콘크리트의 2층 건물로 건축면적 약 400평, 높이 약 13m였으며, 속 건물을 합쳐 전체 건축면적이 약 500평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다. 지하에는 집회실과 사무실을 만들고 스팀난방까지 갖춰, 당시 사찰 건물로는 드물게 근대적 구조와 설비를 자랑했다. 도로도 전차 종점에서부터 약 22m 폭의 벚나무 가로수 길로 확장됐으며 도로에서 정문까지 약 120m, 그리고 정문에서 약 65m 떨어진 제1계단, 그 다음 제2, 제3계단을 거쳐 본당 앞 광장에 닿게 돼 있었다. 본당 정면에는 영친왕이 쓴 ‘춘묘산(春畝山)'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토오는 한국통감 시절 영친왕을 교육시킨다며 사실상 인질로 일본으로 데려갔었다.
 
▲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와 지은 쿠리 (주지 방, 창고)     © 편집부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光化門)을 허무는 등 궁궐을 멋대로 파괴하고 훼손했는데, 국립현충원인 장충단 자리에 이등박문의 영혼을 기리는 박문사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본당은 신축이었지만 쿠리는 경복궁의 선원전(璿源殿: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곳), 정문은 당시 경성중학교(구 서울고등학교) 정문으로 쓰던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을 옮겨다 지었다.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문 뒤 그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특히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 부속건축물인 석고전마저 원구단의 석고각을 이축해 박문사의 종각을 세웠다. 
 
▲ 원구단에 있던 석고전의 원래 모습  
<매일신보> 1935년 3월 23일자에 "춘풍추우 40성상 석고전(石鼓殿) 유래, 불원 박문사(博文社)로 이전"이라는 기사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성 남대문통에 있는 지금 총독부도서관 구내에 숨은 장미(薔薇)와 같이 옛 정조가 길이 흐르며 사람의 눈에 흔히 띄지 않는 숨은 건축물이 있다.
  이것은 이름을 석고전(石鼓殿)이라 하여 국보적 조선대표건물의 하나이다. 몇 해 전에 이곳에 있는 광선문(光宣門)은 약초정 조동사(曹洞寺)로 옮겨갔고, 이제 또 이 석고전마저 장충단(奬忠壇)에 있는 박문사(博文寺)로 옮겨 종각(鍾閣)을 만들기 위하여 오래지 아니하여 이전공사에 착수하게 될 것이라 한다.
  한때의 영화를 자랑하던 역사적 건축물들이 때를 따라 이리로 저리로 옮겨 다니며 여기에 소용이 되고 저기에 이용이 되는 이즈음 이제 멀지 아니하여 옮아갈 석고전은 어떠한 것인가. 그 건축된 유래를 알아보자. (중략) 조선은 갑오의 난이 평정되고 지금으로부터 41년전 을미년에 그때까지 지나의 제후국이던 조선이 독립하여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 정유년에는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께서 등극을 하시자 조선의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이곳에서 천자의 예를 행하셨고 민간에서는 광무 6년경에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송성건의소(頌聖建議所)를 창설하고 고종의 즉위기념으로 지나의 석고를 본떠서 건조한 것이 석고전의 유래라고 한다.” 
 
▲ 경희궁의 홍화문을 옮겨다 만든 경춘문. 해방 후 경희궁 복원 전까지 신라호텔이 그대로 사용했다.     © 편집부

 
그러나 완공 후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에 사는 일본인도 이 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박문사 측은 1930년대 중반부터 절을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로 만들었다. 서울 시내 유람 버스 코스(약 3시간 반 소요)에도 박문사가 포함됐다. 이후 이곳에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일본인이나 박영효 등 친일파의 장례식이 열렸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위령제도 거행됐다.  

박문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전소됐다(경성일보 1945년 11월 26일자). 이승만 정권 말기인 59년 박문사 본당 자리에서 영빈관 신축공사가 시작됐지만 4·19와 5·16 등 잇단 정변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64년 겨우 영빈관이 완공됐으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73년 삼성그룹에 넘어갔다. 79년 영빈관 옆에 호텔신라가 세워졌다. 

아래는 장충단 자리에 세워진 박문사의 배치도이다.
▲ 조선의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을 깔고 앉은 박문사 배치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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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05 [09:4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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