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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아이콘 한나라는 낙양 부근의 작은 나라 (6부)
동북공정에 일조하는 식민사학계의 한사군 이론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2/21 [10:49]
서기 44년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리에게 망한 낙랑국의 땅을 빼앗아 설치한 식민지 낙랑군은 11년 후 고구리 태조대왕이 요서에 10성을 쌓으면서 외형상으로는 거의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구리사초·략>에는 낙랑 땅을 한나라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없다. 여하튼 이후 낙랑의 잔당들이 자주 항거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고구리에게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사초·략>에 “56년 7월, 낙랑의 남은 무리들이 동쪽의 옥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장군 어비신을 보내 동쪽의 옥저를 빼앗아 해서군으로 만들고, 낙랑의 남은 무리들을 환아에 살게 했다”는 기록과 “135년 정월 주나국 왕자가 항복해오자 그 무리들을 낙랑인 부락에 살게 했는데, 2년 후 그 무리들이 낙랑인들과 함께 패수의 하구를 공격해오자 장수를 보내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년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도성태수가 그를 쳐서 죽였다. 낙랑태수가 서안평에 쳐들어오니 안평태수 상잠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추격하여 장언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유주로 도망해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낙랑에 관한 기록은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 중국이 그린 후한 시기의 강역도     © 편집부
▲ 중국이 그린 한사군도     © 편집부
 
 
요동과 현토는 한나라 군현이었을까?
 
고구리와 한나라가 경계로 하고 있던 황하변 일대의 지방호족들은 주변상황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 일대는 줄곧 번조선 왕의 통치를 받다가 연나라 출신 위만·우거의 지배를 받았고, 한나라와의 전쟁 후에는 항복한 번조선 5명 대신의 자치군이 잠시 되었다가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키자 북부여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고구리를 세운 추모대제 고주몽 때 현토군은 고구리의 강역이었음이 확실하다. <고구리사초·략>에 의하면, “B.C 25년 5월 소서노 황후의 이종 오라비인 을음을 현토태수로 삼았다”라는 기록과 “B.C 13년 4월 소황후가 한남(汗南)으로 갔기에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아 성을 지키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47년 3월, 본래 고구리의 속국인 개마국의 신하였던 대승이 고구리를 배반하고는 한나라로 붙게 된다. 그는 간교하고 속임수에 능해 개마국을 잠식했는데, 이 때 고구리의 요동과 현토가 한나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49년 정월 모본제가 장수들을 보내 대승의 목을 베고 우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계속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동이 매년 조공을 약속하며 화친을 구걸하니 물러나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후 요동군과 현토군은 105년 당시에도 한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5년 봄 정월, 태조대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6개현을 빼앗았다가 태수 경기가 군사를 내어 항거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9월 경기가 맥인을 격파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리사초·략>에는 “3월 장수 진북이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현토성 등 6개성을 빼앗자 한나라 병사들이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자 경기가 수비장수로 나와 싸웠다. 태자가 날랜 기병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 들이쳐서 크게 깼다”와 이듬해 송두지를 요동태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고구리가 잠시 잃어버린 요동을 되찾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121년 봄, 한나라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자 대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 싸우게 했다. 수성이 현토·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여름 4월에 요동태수 채풍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직도 한나라 군현이 굳세게 존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120년 2월, 한나라 사람 요광이 스스로 도성태수를 칭하고는 약조를 어기고는 누차 침략하기에, 왕제 수성을 보내 요동을 쳐서 빼앗았다. 요광은 도망갔고 항복한 한인이 천 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2월, 유주에서 쳐들어온 요광의 대군을 험지로 끌어들여 매복한 군사로 모조리 짓이겼으며,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이 무수히 많았다. 계속 추격하여 극성의 성곽과 군량·마초를 불사르고 포로 2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4월, 친히 채풍을 정벌하고 그의 장수 140여 명을 참수하였다. 극성 이동의 땅이 우리 것이 되었다. 채풍은 유주로 도망하여 감히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라는 상세한 기록이 있어 이후 요동과 현토 땅이 완전히 고구리에 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과 여태후의 모습   
 

그해 8월, 한나라에서 조문사절단이 와서 부의를 바치며 화친을 청했다. 수성이 사신에게 등태후의 나이를 물으니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수성이 말하길 “지난날 여태후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너희들은 왜 등수가 내게 허리띠를 풀고 어육이 되게 하지 않았느냐? 호(안제)의 애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라 했더니, 사신들은 말없이 잠자코 있으면서 황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태조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수성을 꾸짖자 아뢰기를 “저는 한나라를 초개(지푸라기)와 같이 여기는데, 제가 어찌 그들을 두려워 할 일이 있겠습니까? 심한 것 아니십니까?”라 하였다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있어 당시 고구리가 얼마나 한나라를 능멸하고 하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수성은 태조대왕의 아우로 선위를 받아 차대왕이 되는 인물로 용맹하기는 하나 어질지 못해 시해되는 폭군이었다.
 
여기서의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왕비, 등태후(등수)는 후한의 4대 화제의 왕비, 호(祜)는 6대 안제를 말하는 것이다. 모돈은 일명 묵돌(冒頓) 선우라고도 하는 흉노의 왕으로 아버지 두만을 시해하고 선우에 오른 인물이다. 당시 흉노는 북부여를 구성하는 주 종족이었다. 수성은 여태후가 묵돌 선우에게 몸을 바쳤듯이, 등태후도 당연히 자신에게 그랬어야 했다는 치욕을 주며 호통을 치는 장면이다. 여태후가 치마끈을 푼 사연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B.C 202년 한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한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토벌을 명하나, 한신은 어렵다 판단하여 흉노와 화평을 시도했다. 이후 한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예 흉노로 투항해버렸다. 묵돌은 한신의 인도를 받아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갔고, 유방도 이를 막으려 출동했으나 묵돌의 유인책에 걸려 평성의 백등산에서 7일간이나 포위당하게 된다.
 
그러자 한고조 유방은 묵돌의 왕비인 연지에게 선물(?)을 주어 포위를 풀고 장안으로 도망쳤고, 이후 유방은 흉노의 묵돌 선우에게 다음 사항을 약속했다. 아래 조건으로 보아 누가 갑(승전국)이고 누가 을(패전국)인지 관계가 명백해진다.
 
1. 한 왕실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그 유명한 미인 왕소군이 바쳐진다)
2. 매년 한나라는 흉노에게 솜, 비단, 술, 쌀 등을 바친다.
3. 한나라 왕과 흉노의 선우 사이에 형제의 맹약을 맺어 화친한다.
 
이후 한고조가 죽고 아들 효혜가 즉위하자 묵돌 선우는 유방의 미망인 여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자 여태후가 크게 노해 흉노를 토벌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모두 한고조의 예를 들어 만류하여 토벌을 취소하였다는 고사의 기록이 전해온다.
 
 
▲ 중국이 그린 산서성 대동은 북위의 도읍 평성이 아니다.  
평성에서 흉노의 연지에게 주었다는 선물은 다름 아닌 위급에 빠진 유방과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왕비 여태후가 묵돌 선우에게 치마끈을 푼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흉노군의 포위를 풀려면 당연히 선우를 움직여야지, 선우의 왕비에게 선물 따위를 주었다고 해서 포위를 풀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방이 묵돌 선우에게 포위를 당하자 여태후가 치마를 벗고, 후에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이끈 북위(北魏)의 도읍이 되는 평성(平城)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은 그러한 평성을 현 산서성 북부에 있는 대동(大同)시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을 이동한 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평음현 : 한나라 때 평음현이 설치되었으며, 응소가 말하기를 ‘평성의 남쪽에 있다. 옛날에 평음이라 했다’ 진나라 때 폐했다.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동쪽이다. 삼국 위나라 때 하음으로 바뀌었다. (平阴县: 秋时平阴邑,《左传昭公二十三年》“二师围郊,晋师在平阴,王师在泽邑。”汉置平阴县,应劭曰:“在平城南,故曰平阴。”晋废,故城今河南孟津县东,三国魏改曰河阴。)”라는 기록이 있어 평성은 황하남부 하남성 낙양시 바로 북쪽에 있는 맹진(孟津)시임을 알 수 있다. 
 
위 고사는 당시 북부여와 한나라와의 국경선이 바로 황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인 한나라는 낙양 부근에 있던 나라로 이렇듯 우리에게 수모를 당했던 작은 나라였다. 이러한 키 작은 꼬마가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했다고 역사를 조작하는 작업이 바로 동북공정인 것이다. 거기에 대한민국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한사군 이론이 크게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 북위의 첫 도읍 평성은 대동이 아닌 황하남부 하남성 낙양의 바로 북쪽 맹진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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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21 [10:4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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