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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1부)
우리와 동족인 흉노는 조선대연방의 일원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3/03 [09:28]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졌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秺侯祭天之胤傳七葉...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秺侯)라는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사스페셜이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은 흉노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나마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멀리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고 억지춘향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과 해석은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 놓고 보는 식민사학의 이론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으나, 원래 초기 신라가 있던 산서성 남부에 놓고 해석하면 그 의문이 깨끗하게 풀린다. 
 
▲ 높이 55cm 너비 95cm 두께 28cm의 파손된 문무왕능비     © 편집부
▲ 사서에 그려진 한나라 투후의 시조 김일제 상     ©편집부

 
흉노는 조선대연방의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흉노와 조선을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에 따르면 “3대 가륵 단군 B.C 2177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조선의 제후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1세 소태단군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흉노)의 땅을 차지하고는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는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와 같이 흉노는 곧 조선의 일부이며 한 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흉노는 중국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신해 기록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이 흉노를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감숙성에 있는 흉노라기보다는 당시 북부여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한 장성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한 고조 유방을 평성의 백등산에서 포위한 주체도 흉노이고, 천하의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게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북부여라는 나라이름 대신에 흉노, 동호, 예, 맥 등 종족명을 사서에 기록해 마치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외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일제의 이야기이다.
 
▲ 한무제 묘역 곽거병묘 옆에 있는 김일제의 무덤     © 편집부
▲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의 묘비     © 편집부

 
김일제가 한나라로 가게 된 사연
 
한나라 무제의 처조카인 장수 곽거병은 18살 때 위청의 부장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21살 때인 B.C 1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해 롱서(隴西)에서 흉노를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참고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산서성 서남단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다. 즉, 북부여의 남쪽 강역이었다.

이때 흉노 선우의 번왕(제후)였던 휴도왕(休屠王)과 혼사왕(渾邪王)이 계속 한나라에게 패배하자, 선우가 그들을 송환해 죄를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다.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사왕은 그를 살해하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피살된 휴도왕의 장남이 바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로 그때 나이 14살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는 처음에는 장안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키우는 노비로 있다가 일처리를 워낙 잘하다보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마구간을 감독하는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오르게 된다.
 
▲ 감숙성 무위시에 있는 김일제의 석상     © 편집부
▲ 석상 앞에 서있는 김일제 안내문     © 편집부

김일제는 망하라가 한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목전에서 격투 끝에 막아낸 공으로 거기장군이 되고, 무제는 일제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이란 금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성을 김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역사상 최초로 김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제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공주를 유혹하려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해 자식을 죽이고는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상심했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동했고, 나중에 한 무제는 죽으면서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즉, 김일제가 한나라 조정의 핵심권력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나라 소제는 김일제가 병들어 죽기 직전 그를 투후(秺侯)에 임명했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그 관작을 세습토록 했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 무제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섬서성 흥평현(興平县)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김씨 집안의 내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편집부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라 하는데,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묘비명에 대한 해설은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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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3/03 [09:2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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