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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를 무너뜨린 왕망은 원래 김씨인가? (2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흉노 휴도왕의 고손자인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3/05 [14:21]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아래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여셨으니 소호씨금천이라 한다.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金氏)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위 비문에서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면서, 신라 김씨의 조상이 한나라에서 신라 땅으로 피난가게 된 사연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한나라의 난리를 피해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난리란 바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新)이 패망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다. 
 
▲ 사서에 그려진 흉노 휴도왕은 김일제의 부왕     © 편집부
 
        
전한 말기의 최고권력자 왕망은 누구인가? 
 
▲ 신나라 1세 황제 왕망     ©편집부
왕망은 B.C 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있다가 64세 때인 A.D 9년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9~25)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호는 가짜 황제라는 뜻인 가황제(假皇帝) 또는 황제를 섭정했다는 뜻인 섭황제(攝皇帝)라고도 하며, 중국의 역사기록에서는 '찬탈자'로 기록하고 있다.
 
왕망의 가문은 무척 지체가 높은 가문이었다. 왕망의 아버지의 이복여동생이 한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였다가 원제가 죽고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태후가 되어 왕씨 일가는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관운(官運)은 불투명했다.
 
B.C 22년 그는 궁중에서 비교적 낮은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B.C 16년 신도공(新都公)이라는 귀족작위를 받게 된다. B.C 8년에는 황제를 대신하는 섭정에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를 잡았으나, B.C 6년 성제가 죽고 조카인 애제(哀帝)가 등극하자 왕망은 파면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B.C 1년 애제가 갑자기 죽자 이복고모인 왕태후가 왕망을 불러 섭정에 임명했다.
    
섭정이 된 왕망은 재빨리 조정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새 황제인 평제(平帝)의 황후로 책봉해 정권을 잡았다. 평제가 A.D 6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왕망의 정치적 지위도 불안정해지자, 정적들은 정치공세를 펴 그가 평제를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왕망은 50명에 달하는 후계자 가운데 2살짜리 영(嬰)을 황제로 선임함으로써 후계문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다.
 
그는 6년에 가황제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때 왕망은 황족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산발적인 반대에 부딪쳤으나 손쉽게 진압했다. 그는 조직적인 대규모 선전공세를 펴 한나라의 국운이 다했으므로 새로운 국가를 열라는 하늘의 명이 자신에게 내렸음을 알렸다. A.D 9년 드디어 왕망은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의 첫 황제로 등극하며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신나라 황제로 등극한 왕망
 
왕망이 황제로 재위하고 있었을 때의 사료가 매우 빈약한 이유는 신나라가 붕괴되고 유씨의 한나라가 다시 복원된 후 당시의 역사가들이 왕망의 치적은 모두 없애고 그를 사악한 찬탈자로 매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왕망은 이상주의적 개혁가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독실한 유생(儒生)인 동시에 미신을 믿는 현학자(衒學者)였다.
 
그의 재정·농업 정책은 한대의 관습과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들 3명, 손자 1명, 조카 1명을 처형할 정도로 가족에게도 예외 없는 철저한 법치주의자였다. 그는 면학과 폭넓은 지식의 수용을 권장해 대외정책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위기간 중 3차례 이상 황하가 범람하는 재해를 당하게 된다.
 
여러 차례 일어난 수해로 인구가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 등이 생기면서 사회불안이 증가하다보니 마침내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만다. 그 규모가 점차 커져갔으며, 이 같은 농민군의 하나인 적미(赤眉)는 18년부터 규모가 커져 왕망의 신나라 관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도성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23년 10월 4일 반란군은 도성의 동쪽 성벽을 뚫고 저녁 무렵 황궁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아침 도성의 백성들까지 반란에 가세해 황궁에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옥쇄를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끝까지 황궁을 지키려 했다.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몸이 점점 더 쇠약해져갔고, 10월 6일 새벽에 미앙궁으로 옮겨가 천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들과 함께 마지막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수비를 했고, 그 후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오후 늦게 반란군이 미앙궁으로 몰려 들어왔고, 왕망은 측근들과 함께 피살되고 만다. 
 
▲ 신나라 황제 왕망의 최후를 그린 삽화                                                                 © 편집부
 
 
왕망과 신라 김씨와의 관계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나라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집안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왕망이 섭정으로 전권을 휘두를 때나 황제가 되었을 때, 김일제의 투후를 세습받은 김씨 집안은 당연히 한나라에서 정치실세가 되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 나아가 재야사학자 문정창 선생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하면서, 반고(班固)가 <한서>를 편찬하면서 왕망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로 기록된 사서도 있다.
                                                       
<한서 김일제전>에는 “김당의 어머니는 남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母南卽莽母)”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던 김당과 왕망은 동복형제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와 아주 가깝고도 깊은 관계였던 것이다.
 
왕망은 제도개혁의 실패와 전국에서 일어난 호족들의 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劉氏)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신나라 황제였던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자, 신나라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신라 김씨의 시조 김일제 상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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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3/05 [14:2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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