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신라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신라의 초기도읍은 중국대륙 산서성 남부 (6부)
산서남부 임분시의 금성은 김일제의 후손들이 피난온 곳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4/05 [10:43]

신라의 천년고도라는 금성(金城)이 지금의 경상도 경주라는 것은 그야말로 반도사관에 중독된 일제식민사학계의 이론일 뿐이다. 과연 신라가 천년 동안 경주(금성) 한 군데만을 도읍으로 했는지 여러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신라의 초기도읍지에 관한 기록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갑자년(B.C57)에 개국했는데, 왕도의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이며 35리(里)에 6부가 있었다. 21년(B.C37) 경성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26년(B.C32)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어 남해차차웅 원년(4) 낙랑(국)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금성은 낙랑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사이사금 22년(101) 금성의 동남쪽에 주위 1,023보(步)의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하였고, 7월 왕이 월성으로 이거하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어 주위가 1,838보, 또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며 주위가 1,906보, 또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주위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였으며 후세에 와서는 두 월성에 주로 거처하였다.
 
길이의 단위인 보(步)는 통상 어른 남자의 발걸음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4~8척(尺)을 1보로 했고 도량형을 통일했다는 진시황 때 통상 6척을 1보로 하여 약 150~180cm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인 남자의 보폭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보폭인 50cm 정도 또는 2걸음인 약 1m를 1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후 자비마립간 18년(475)에 명활성(明活城)으로 이거한다. 이때는 장수왕이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창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였다. 그리고 소지마립간 때 다시 월성으로 천도한다. 이와 같이 신라는 도읍도 여러 차례 옮겨지고 국호도 여러 차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도읍지인 금성과 월성으로 천도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금성이 초기도읍지와 같은 곳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신라의 초기도읍지인 금성이 있던 산서성 임분시 일대는 서기 55년 전후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고, 장수왕 때(427년)는 아예 그곳으로 도읍(평양성)이 옮겨옴에도 불구하고 계속 금성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옮겨간 도읍에서 금성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비문에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리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신라는 먼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산서성 임분시에서 발견된 金城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토성의 서문     © 편집부

신라의 초기 금성은 산서성 임분시
 
2008년 산서성 임분시에서 금성(金城)이라는 석판을 단 토성인 금성보유적(金城堡遺蹟)이 발견되었는데, 동쪽 성벽의 길이가 144m, 서쪽 성벽이 126m, 남쪽 성벽이 109m, 북쪽 성벽이 123m로 주위 502m이고, 그 금성보유적 서남쪽 분하의 동북안 구릉지에서는 동서 약 500m 남북 약 300m 주위 총 1,600m의 외성이 발견되었다.
 
신(新)나라 왕망이 망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간 땅은 과거 김일제와 관련 있는 요동(遼東) 땅으로 산서성 임분 일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김일제로부터 시작된 김씨의 종가(宗家)가 산서성 임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산서성 임분에 초기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金城)이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에 “B.C 86년 한나라 소제 때 고두막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이라고 나라이름을 붙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부여의 옛 도읍 장당경 = 진한(辰韓) = 신라의 옛 땅’이란 말이다. 김일제 후손들이 한(漢)나라의 난을 피해 옮겨간 요동(遼東)은 바로 신라의 금성(金城)으로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도망간 한(韓)의 땅인 것이다. 이를 유적으로 입증한 것이 산서성 임분에서 발견된 금성유적인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 “신라는 변한의 후예로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왕이 있는 곳을 금성이라 부르며 둘레가 7~8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나라 때 1리(里)는 약 530여m 라는 학설이 있어 7~8리면 약 4km로 환산할 수 있을 것이다. 도량형은 시대마다 기준이 달라 정확한 길이는 추정할 수 없다고 본다.

▲ 산서성 임분시에서 김일제 화상을 모시고 살고있는 종손     © 편집부
 
 
신라가 차지한 옥저와 예는 어디인가?
 
<북사>와 <수서> 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신라는 고구리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낙랑 땅에 있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위치를 추적해보면 초기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이 산서성 동남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와 예가 언급된 사서는 다음과 같다.

1)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에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현)과 예맥에 접하고,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한다. (중략)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대해(=황하)변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이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 가능하며,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한나라 초기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해 왕이 되었을 때 옥저가 거기 속했다. (중략) 한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해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었는데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족이 거기를 침입해 구려(현)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현토 옛 부이고, 옥저는 여전히 낙랑군에 속했다.
 
(원문) <三国志 魏书卷三十 乌丸鲜卑东夷传>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 东与沃沮 北与夫余接。(중략) 东沃沮在高句丽盖马大山之东,滨大海而居。其地形东北狭,西南长,可千里,北与挹娄、夫余,南与濊貊接。(중략) 汉初,燕亡人卫满王朝鲜,时沃沮皆属焉。汉武帝元封二年,伐朝鲜,杀满孙右渠,分其地为四郡,以沃沮城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句丽西北,今所谓玄菟故府是也。沃沮还属乐浪。
 
2)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에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현)과 옥저에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 서로는 낙랑에 접한다. 예와 옥저 구려는 본시 조선의 땅이었다. (중략) 한 무제 원봉 3년(B.C108)까지 (번)조선을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했다. (중략) 단단대령부터 이미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했다. 이로써 그 땅이 넓고 멀어 고개 동쪽을 7현으로 나누었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원문) <后汉书 卷八十五 东夷列传 第七十五> 濊北与高句骊、沃沮,南与辰韩接,东穷大海,西至乐浪。濊及沃沮、句骊,本皆朝鲜之地也。(중략) 至元封三年,灭朝鲜,分置乐浪、临屯、玄菟、真番四郡。(중략) 自单单大领已东,沃沮、濊貊悉属乐浪。后以境土广远,复分领东七县,置乐浪东部都尉。
 
위 기록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맥은 고구리의 남쪽으로 낙랑군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 역시 낙랑군 땅에 있는데 그 위치가 예맥의 동북쪽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예맥과 옥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즉 낙랑군은 패수현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졌으므로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 또는 약간 넓게 보아 산서성 동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산서성 남부 황하변에서 역사왜곡을 위해 옮겨진 낙랑군     © 편집부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4/04/05 [10:43]  최종편집: ⓒ greatcorea.kr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