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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동옥저를 빼앗은 고구리 태조대왕 (8부)
고구리에게 뺏긴 신라의 옥저는 산서성 동남부 황하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4/22 [10:38]
<북사>와 <수서> 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신라는 고구리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낙랑 땅에 있었다.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예(濊)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옥저는 본시 신라 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예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 컬럼 참조)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590)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3년(55년) 고구리 태조대왕은 한 군현이 있던 요서(遼西) 지역을 빼앗아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고는, 이듬해 7월 신라 땅이었던 동옥저(東沃沮)를 공격해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때 후한의 광무제가 11년 전인 44년에 설치했던 한나라 군현이 거의 유명무실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 잔당들에 의한 항거는 간혹 있었을 것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4349)

이 요서 10성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 28년(65년) 개마, 하성, 구리, 고현, 남구, 자몽(곤도), 구려(句麗), 거란, 하양, 서안평(西安平)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지명간 거리까지 상세히 언급된 것으로 보아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안시(安市)는 개평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요동(遼東)은 창려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건흥은 난하의 서쪽,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  <태백일사.에 기록된 태조대왕이 요서에 쌓은 10성의 위치                                                       ©편집부
 
동옥저가 고구리로 넘어갈 당시 신라는 3세 유리이사금 33년으로 <삼국사기>에 “여름 4월 용이 금성 안에 있는 우물에 나타나더니 이윽고 폭우가 서북방에서 몰려왔다. 5월 태풍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라는 은유적인 기록을 남겼다.

동옥저의 남쪽에 있는 남옥저는 고구리가 위나라 관구검에게 허를 찔려 도읍인 환도성을 빼앗기자 동천태왕이 도망간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곳은 과연 어디일가? <백과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옥저(沃沮)는 지금의 함경남도 북부에서 두만강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읍락집단으로, 대개 함경도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집단은 동옥저라 불렸고 두만강 하류와 간도지방에 살았던 집단은 북옥저라고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중국 사서를 통해 우리는 옥저는 고구리의 동쪽, 예의 북쪽에 있으며, 황하변에 있고 낙랑군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가 북부 하남성과 산서성의 동남부 일대이므로 옥저도 그 일대로 볼 수 있다. 즉 허구의 한사군 즉 낙랑의 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590)

옥저= 해주(海州)= 해성(海城)

예의 북쪽에 접한 옥저는 해성(海城) 또는 해주(海州)로 불리었다. 동양사학계는 海자만 나오면 이를 황해바다로 해석하는 역사왜곡을 저질러왔다. 일례로 당나라 10만 대군이 황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된 실제 海는 황하, 발해 같이 큰 호수, 넓은 벌판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해주가 과연 어디였을까?

해주에 대한 설명에서는 “해주는 본 옥저국의 땅으로 고구리 때 사비성 또는 비사성으로 했다.(海州: 本沃沮国地,高丽为沙卑城,亦曰卑沙城)”라는 기록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고구리 비사성이 해주 즉 옥저 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식민사학계에서는 요녕성 대련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해성현에 대한 설명은 “주와 진 때 조선(현)에 속했으며, 한 때 현토군에 속했고, 후에 바뀌어 낙랑군에 속해 동한 때 도위를 설치한 이래로 옥저에 봉해진다. (중략) 금 때 등주로 고쳤으며, 원 때 요양로에 속했고, 명 때 소주위를 설치해 요동도지혼사사에 예속시켰고, 청 순치제 때 해성현을 설치해 요양부에 속하게 했다. 봉천부로 바꾸어 민국 때 요녕성 요심도에 속하게 했다.”에서 20세기 민국 때 해성현이 요녕성으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海城县 : 周秦属朝鲜,汉属玄菟,后改属乐浪,东汉置都尉,以封沃沮,魏属牟州,晋及隋属高名骊,唐平高玉,。属盖州,入渤海为南海府,辽置海州南海军。金改澄州,元属辽阳路,明置少州卫,隶辽东都指挥使司,清顺治间置海城县,属辽阳府,寻改属奉天府,民国因之,属辽宁省辽沈道。清置,详海原县条。

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해성현에 대한 연혁에서 보듯이, 해성현은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요녕성 요동반도 영구(營口)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동남부에 있었던 옥저가 명나라와 민국 때 역사왜곡을 위해 제멋대로 지명이동 되었던 것이다.

▲ 원래 산서성 동남부에 있던 옥저·예·맥이 역사왜곡을 위해 한반도 동해변으로 지명이동 되었다.     ©편집부

동생 차대왕에게 양위하는 고구리 태조대왕

3세 대무신왕 ~ 6세 태조대왕 시기는 고구리의 초기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이러한 태조대왕을 군사적으로 보필하던 수성(遂成)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로 7살의 나이에 태왕이 된 태조대왕은 69년(121년) 76세가 되자 전공이 많은 동생 수성에게 나라의 정치와 병권을 모두 맡기게 된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나도 태조대왕이 계속 태왕위에 있자, 94년(146년) 수성은 사냥터에서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대왕이 늙어도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점차 저물어가니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모두 나를 위해 도모하라”고 종용한다. 이러한 역모의 낌새를 알아차린 우보 고복장이 태조대왕에게 고변하며 역심을 품은 수성을 먼저 죽이라 청하니, 태조대왕은 오히려 동생인 수성에게 양위하고는 별궁으로 물러나고 만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리 초기 태왕 가계도                            © 편집부

태조대왕을 밀어내고 76세의 나이에 고구리 7세 태왕이 된 수성(차대왕)은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사적으로 세운 공도 많았으나, 성격이 무척 포악했으며 술을 즐겼다고 한다. 즉위하자마자 태조대왕에게 자신을 죽이라 청했던 우보 고복장을 칼로 베어 죽이고, 자기 옛 친구들을 승진시켜 요직에 두루 기용했다.

또한 3년(148년)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자, 그 아우 막덕은 화가 자기한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 차대왕의 막내아우인 백고(伯固,신대왕)은 친형 차대왕이 충신들과 조카들을 죽이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산 속으로 피신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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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22 [10:3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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