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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의 목화 기록은 사대주의의 발로
문익점 보다 앞선 신라와 고려의 목화 사용과 800년 앞선 면직물 발견
 
한눌 한문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5/28 [16:47]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가지고 온 시기 보다 1천여 년 앞서 실생활에 사용해 왔음을 보여주는 사서 기록이 있어  면(綿)에 대한 역사를 재 정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1595년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그가 지은  기언(記言) 제33권 원집(原集) 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상편에 "미추가 졸하니 조분의 아들 유례(儒禮)가 즉위하여 사도(沙道)에 성을 쌓고, 사벌주(沙伐州 경북 상주)의 호부(豪富)들을 사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인관(印觀)과 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솜[綿] 장수로 서로 사양하고 이익을 다투지 않았는데, 유례가 소문을 듣고는 어질게 여겨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라 썼다.  (味鄒卒。助賁子儒禮立。築城沙道。徙沙伐州豪富於沙道。賜印觀,  署調二人爵。二人者鬻綿。相讓不相取。儒禮聞之。賢而爵之)

유례는 신라 제14대왕으로 284∼298년간 재위했던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이다. 왕이 인관과 서조에게 벼슬을 주는데 이들이 솜 장수라 했음을 보아 이미 이 시기에도 목화가 재배되었으며, 솜이 널리 쓰였음을 보여 준다. 672년  신라왕이 고구려 왕 안승에게 면(綿:목화)를 주었다고 한 <삼국사기> 기록 보다 388년, 문익점이 가져 온 연대 보다 1,079년이나 빠르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기록을 보자. "1096년 고려 숙종(肅宗) 원년 8월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이어 의복ㆍ폐백ㆍ실ㆍ솜(綿)을 차등하게 하사하였다"
1221년 고려 고종 8년 8월 몽고(蒙古)의 사신 저고여(著古輿) 등이 왔다. "토산물(土産物)을 요구하여 왔는데, 세모시[細苧] 2천 필, 면자(綿子) 1만 근 등 그밖에 요구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 경남 산청군에 있는 목화시배유적지                                                                                                                 ©

지금까지 목화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1363년 고려 공민왕 12년에 문익점(文益漸1329-1398)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 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목화씨를 얻어 와 처음으로 번식시켰으며,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얻어온 목화씨를 재배 번식시키고, 씨아와 물레도 만들었다고 했다. 전하기로는, 문익점이 초면(草棉)의 종자를 얻어 상투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다,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다고 하여 그 과정이 목숨을 걸만큼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신흠(申欽 1566 ~1628)이 지은 승국유사(勝國遺事)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元)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종자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는데, 심은 종자가 다 말라 죽고 다만 한 줄기가 살아 남았으므로 이를 3년간 거듭 재배한 끝에 드디어 크게 번성하였다. 그의 장인 정천익이 취자거(取子車 면화씨를 빼내는 기계로 씨아이다)와 소사거 (繅絲車 실뽑는 기계)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고 있다."고 썼다. 신흠은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六) 일본 면화(綿花)의 시초에서 왜인(倭人)이 지은 일본일사(日本逸史)를 인용, "우리나라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목화씨를 얻어온 것이 일본보다 6백여 년이나 뒤진다. 우리나라의 생활을 부유케 하고 기용을 편리하게 하는 정치가 다른 나라에 뒤떨어졌으니, 아마 나라를 위한 계책에 마음 쓰지 않았음이 예부터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선조 대학자인 이들은 신라, 고려의 기록을 왜 놓쳤을까, 아니면 사대(事大)에 기인함인가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아래는 문익점보다 800년이나 앞서는 면직물이 발견되었다는 2010년 뉴스이다.
▲ 문익점보다 800년 앞서는 면직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     ©편집부
고려말 때인 14세기 후반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오면서 시작됐다는 한국 면직물 기록이 무려 800년이나 올라갈 전망이다.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유물을 기획 전시 중인
국립부여박물관은 최근 전시 유물을 정리 분석하는 과정에서 1999년 능산리 절터 제6차 조사에서 수습한 직물(폭 2cm, 길이 약 12cm)이 면직물임을 최근 확인했다고 15일 말했다.

박물관은
한국전통문화학교(심연옥·정용재 교수) 팀과 함께 첨단 기자재인 주사전자현미경(SEM)을 이용해 종단면을 관찰한 결과, 면 섬유의 특징이 뚜렷이 관찰돼 이 직물이 식물성 셀룰로스 섬유로 짠 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결과는 이 직물이 목화에서 실을 뽑아 독특한 방법으로 직조됐음을 가리키는 대목이라고 박물관은 강조했다.

면직물의 재료가 되는 목화는 역사적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문익점을 통해 한반도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실물을 통해 확인된 국내 최고(最古) 면직물은 안동 태사자 묘에서 출토된 흑피화(검정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의 안쪽에 붙은 직물이 꼽혔으며, 그 제작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 때로 추정됐다.

하지만 능산리 절터 서쪽 돌다리의 백제시대 유적 층에서 출토된 이번 면직물이 확인됨으로써 한국 면직물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됐다. 이 면직물은 같은 층위에서 567년 백제 창왕 때 제작한 이른바 '창왕명 사리감'제작 연도를 고려할 때 문익점보다 무려 800년을 앞서는 국내 최고 면직물로 볼 수 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이번 면직물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물 직조법과는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로 밝혀졌으며,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이번 조사성과는 오는 10월 국립부여박물관이 개최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정식 보고될 예정이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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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5/28 [16:4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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