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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까지 중국에 존재했던 식인문화
 
한눌 한문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6/05 [17:09]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黃文雄)은 중국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사(正史)의 기록에 보면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은왕조의 주(紂)왕이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자 아내를 살해하고 구후를 회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 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고 합니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습니다.

인육은 또한 약용으로도 쓰였는데,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 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지요.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고 하니 인육시장이 얼마나 크게 형성 되었는지 짐작이 갈만 하지요.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습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습니다. 단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있던 식인풍습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과 문제의식이 제기 된 것이지요.

식인문화라고 하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아프리카 저 어딘가에 있는 미개한 부족의 문화, 또는 끔찍한 범죄자만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중국에서는 그런 역사가 면면히 흘러왔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 식인 풍습이 고대의 풍습에 그치지 않고 최근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지요.

불과 30-40년전 모택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홍위병이 날뛰던 문화혁명 당시에도 중국 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인육을 만두로 판매하는 업소를 흑점이라고 하는데 5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에도 흑점은 존재했답니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와,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의 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 등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인들에게 뿌리박히게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군 및 국민 등은 "잡아먹히는 인육"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 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 것도 중국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유교의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는 측면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거리낌 없이 행해질 수 있는 뒷받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 5개월 된 태아를 먹고 있는 중국인     ©편집부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뜻밖에 죽거나 갑자기 죽은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문화라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지만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의 식인문화를 알아보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나라 시대에 식인문화의 현장을 목격했던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얼마나 당황스럽고도 낯선 문화에 흥미로웠을지 궁금해지네요. 마르코 폴로에 대해서는 동방견문록에 담긴 내용들이 진실인가에서부터 그가 실존인물인가라는 의심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마이러브차이나 중에서.  


-예기 곡례편(禮記 曲禮篇)의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를 보자.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원수를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또 이 말은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과 비교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노나라 문군이 묵자(墨子)선생에게 말했다. 초(楚)나라 남쪽에 식인국이 있는데 첫 아들을 낳으면 잡아먹으면서, 이것이 다음에 태어날 동생에게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맛이 있으면, 군주에게 바치면 그 아비에게 상을 줍니다. 이 얼마나 몹쓸 풍속입니까?

-묵자/노문(魯問) 중에서
墨子: 중국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전쟁이란 아비를 죽여 자식이 상을 타는 제도인데, 자식을 잡아먹고 상을 타는 식인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비를 먹는 전쟁도 인의를 저버린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찌 자식을 먹는 식인종만 비난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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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6/05 [17:0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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