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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이 붕어하자 소복입고 곡한 당태종 이세민
백제와 당나라와의 상하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7/09 [16:54]
제의 역사를 고찰하다 보면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뛰어넘는 사서의 기록을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제의 임금은 황제를 칭하지도 않았으며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였던 조그마한 나라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의 한 사람으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었다는 당태종 이세민을 꼽는다. 당태종이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후회를 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당태종이 백제의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소복(素服)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당태종, 백제 무왕이 붕어하자 소복(素服)입고 통곡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정관 15년(641년) 장(璋)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상을 고하자 태종이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라고 하여 백제 무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42년(641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夫餘璋)이 죽었다(君外臣扶餘璋卒).’라고 하자 제(帝)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였다.”라고 되어있어 <신당서>의 내용과 같다.

일국의 제왕이 다른 나라의 임금이 죽었을 때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는 예는 <구당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서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우리를 대등한 관계가 아닌 동방의 작은 오랑캐 제후국 정도로 여기는 중화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내용이다. 천하의 당태종이 백제 무왕의 죽음에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애도식을 거행하였다면 그 상하관계가 자명하다.

옛날에는 황제의 죽음은 ‘붕(崩)’이라 하고, 제후나 왕의 죽음은 ‘훙(薨)’이라 하며, 벼슬아치는 ‘졸(卒)’이라 하며, 일반 사람들은 ‘사(死)’라 하였다. <신당서>를 인용하여 기록한 <삼국사기>에서는 당태종을 ‘제(帝)’로 기록하고 무왕의 죽음을 ‘훙(薨)’으로 기록하는 등 스스로를 비하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무왕이 당태종에게 올렸다는 표문에는 분명하게 당태종을 ‘제(帝)’가 아닌 ‘군(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신하가 황제를 지칭할 때 ‘군(君)’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군(君)’은 처음에는 제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후대에는 봉지를 받는 제후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구당서> 등 중국의 사서들은 중화사관에 의해 기록되다 보니 무왕의 죽음을 사대부나 벼슬아치의 죽음처럼 ‘졸(卒)’로 기술하여 놓고는 황제가 소복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하였다고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안시성을 잘 지키라 하며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춘추필법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당태종의 너그럽고 황제다운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치욕을 감추기 위한 곡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당태종과 백제의 무왕과의 관계를 보면 백제 말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모습 - 여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대왕 폐하라 하고 있다.                                                                                              © 편집부


당태종을 무왕 표문에 '제(帝)' 아닌 '군(君)'으로 기록해

<삼국사기>와 <구당서> 그리고 <신당서>를 보면 백제의 무왕이 소위 당나라에 바쳤다는 물품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무왕이 첫 번째로 바친 것은 과하마(果下馬)이며, 그 다음은 명광개(明光鎧), 철갑(鐵甲), 조부(雕斧) 등이다. 이는 모두 전쟁물품이며 전투장비들이다.

키가 3척이며 말을 타고 과수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었다고 하는 과하마는 <후한서>와 <삼국지>에서는 예(濊)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백제에서도 산출이 되었다는 것은 예와 백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 말기에 예의 땅을 차지하였다는 말이다.

명광개는 황금처럼 밝게 빛이 나는 쇠로된 갑옷을 말한다. 명광개는 백제의 세 개의 섬(三島)에서 나는 황칠(黃漆)을 갑옷 표면에 입혔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반적으로 칠하면 검은 색의 옻칠을 떠올리기 쉽지만 백제에서는 황칠이 생산이 되었으며 <신당서>에서 소개하고 있다.

<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의 기후는 온난하며 오곡 잡과와 채소가 많으며 내지(內地)와 같다. 백제 해도(海島)에는 황칠나무가 있는데 모습은 작은 종려나무와 비슷하나 크다. 6월 중에 즙을 채취하여 기물(器物)에 칠을 하면 황금과 같고 그 빛이 눈이 부시다.”라고 하였으며,

< 절강통지(浙江通志)>를 보면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는 절강 지역의 순안(淳安), 수안(遂安), 수창(夀昌)의 세 개의 현에서 난다고 하였으며, <본초강목>에서는 절강 동쪽에서 나는데 소가(小榎)나무와 흡사하고 6월에 즙을 채취하여 사물에 칠을 하면 황금색으로 금과 같다고 하였다. 즉 <신당서>에서 말한 황칠이다.”라고 하였으며

위 <절강통지>에서 말하는 ‘절강성에서 나는 황칠이 <신당서>에서 말한 황칠’이라면 절강성 지역이 삼국시대의 백제 강역이라는 셈이 된다. <신당서>에서 황칠에 대한 기사는 ‘동이전 백제 조’에만 나오기 때문이다. 황칠은 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칠로, 고려시대에는 고려칠로 불렸다. 그렇다면 양자강 이남지역은 백제 지역으로 있다가 후대에 신라로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삼국사기> 최치원 전의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는 기사가 사실로 확인이 되는 셈이다. 
 
▲ 황칠이 생산되었다는 절강성의 순안, 수안, 수창 지역 - 대청광여도에서 편집. '성씨고략’에 의하면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와 8대 성(姓) 중의     ©편집부


부여의 백제 사신, 하루 만에 양자강 도착?

양자강 이남지역이 바로 ‘월(越)’지역이라는 것은 역사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다 안다.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와 <북사(北史)> 등의 여러 사서에서 “백제는 진(晉)나라 때부터 송(宋), 남제(南齊), 양(梁)나라 시기에 양자강 유역을 점거하였다(自晉宋齊梁據江左).”는 기사가 이를 확인시켜 준다.

또한 고구려를 침략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선 수(隋)나라 양제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양자강 유역 점거를 간접 확인할 수 있다. <수서(隋書)> 권3에서 수양제는 낙양에서 강도(江都, 양자강 하류 유역, 장보고의 ‘해신’드라마로 유명했던 양주(揚州)지역임)로 가는데 “대업7년(611년) 2월 기미(己未), 상이 조대(釣臺)에 오르고 양자진(揚子津)에 이르렀다. 여러 관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나누어 주었다. 경신(庚申)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611년에 무왕이 봄 2월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여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수나라를 돕고자 하니 수양제가 기뻐하여 석율(席律)을 보내와서 무왕하고 서로 모의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 <수서>에서 수양제가 강도로 가서 연회를 베푼 기미(己未)와 경신(庚申)은 하루 차이이다. 충청도 부여에 있는 백제가 어떻게 이역만리의 수양제가 강도에서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알고 장안이나 낙양이 아닌 양자강 유역으로 하루 만에 갔었겠는가?

또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백제가 어떻게 대륙의 지리와 고구려의 사정을 알고 향도(嚮導) 역할을 하며 수나라 편을 거들었겠는가? 이는 백제의 강역이 양자강을 끼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백제의 도움을 얻고자 양자강으로 갔던 것이다.

백제가 수나라의 향도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와 교역을 하였던 당시의 첨단 군사물품들이 고스란히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도구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명광개 일만 개를 획득하였다는 기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강역이 광대하였다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성이 두 개일 뿐만 아니라 22개의 담로를 두고 있었으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이어져온 정치 군사적 제도 때문이다. <송서(宋書)> 권97 동이열전 백제 조에는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와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좌우현왕(左右賢王)은 유라시아 대륙을 섭렵했으며, 한(漢)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흉노의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 사기>와 <한서>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선우(單于)를 칭하기를 탱리고도(撐犁孤塗) 선우(單于)라 한다. 흉노에서 하늘을 ‘탱리(撐犁)’라 하고 자식을 ‘고도(孤塗)’라 하며 선우는 광대한 모습이다. 하늘의 (광대한)모습을 본떠 선우라고 말한다. 좌우현왕과 좌우녹리,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제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도기(屠耆)라고 한 까닭으로 항상 태자를 좌도기(左屠耆)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역사, 때 되면 소리치며 다시 일어난다

천손사상을 갖고 있는 흉노의 이러한 제도는 단군조선의 일원으로 존재하였을 당시에 존재했던 것이며  좌우현왕 제도도 단군조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 조에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많은 군대를 손에 넣어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단군조선 삼한(三韓) 중에 번한(番韓)을 가리켜 우현왕이라 하는 것이며,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소태 단군의 뒤를 이어 22세 단군조선의 단군으로 등극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좌우현왕 제도는 단군조선으로부터 흉노에 이어 백제가 그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최초로 중원대륙을 통일하였다는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통일 후 15년 만에 망하였고, 한족(漢族)의 영원한 중심이라는 한(漢)나라는 북부여의 도움으로 건국되어 한무제 때의 전성기를 지나 백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였다. 앞서 언급한 당태종 이세민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측천무후라는 일개 여자에 의해 22년 만에 사직을 고하였음에도 당나라를 존속시킨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일개 나라의 존속기간이 나라의 강성함과 꼭 비례한다고 할 수 없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 백제가 가장 짧은 678년의 존속기간이었음에도 위 중국의 나라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역사가 길면 그만큼 부침(浮沈)의 폭도 컸을 것임으로 단편만으로 모든 것을 조명하지 못할진대 잘못된 역사를 고정화시키는 편견은 낙화암 저편으로 사라져야 한다. 역사는 때가 되면 소리치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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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7/09 [16: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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