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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개명(創改名), 그 천년의 비극
이성계의 휘 단(旦)을 피해 아차산( 阿且山)으로 바뀌고, 정몽주 신사임당의 작명 사연
 
한눌 한문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7/17 [11:55]

“나도 많이 늙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 (子曰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기록된 내용이다. 주공(周公)을 못내 그리워했던 공자의 이 한마디로 주나라는 이상향(理想鄕)되었다. 세인들의 가슴을 적시고, 주공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오백년 조선 사대부들의 심장에 각인되고, 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공의 이름은 단(旦), 형 희발(姬發)이 쿠데타를 통해 무왕(武王 기원전 1046년)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도와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무왕이 일찍 죽자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공자는 旦의 이러한 공적을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로 보았고, 큰 성인(周公大聖)이라 추앙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있는 주공 동상     © 편집부


이처럼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추앙하므로써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사필원칙(史筆原則)이 정해지고 동이족은 존주양이(尊周攘夷), 상내약외(詳內略外), 위국휘치(爲國諱恥)의 틀 안에 갇쳐 굴욕의 세월을 감내하게 되었다.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그의 저서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에서 춘추필법에 대해 이는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존주사상(尊周思想)은 明나라로 이어지고 건국 조선의 기틀이 되었으며, 절대적 가치로 부상했다. 신생 조선을 연 이성계, 만고 충신의 반열에 오른 정몽주, 여성의 표상 신사임당이 다투어 창개명(創改名)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의 모든 것은 이 사상으로 통하고 지배되었다. 산천 또한 창지개명(創地改名)를 통해 또 다른 이름으로 둔갑되었다. 당리당략으로 이견(異見)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미명하에 절단되고 도륙 당했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등극하면서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공자가 꿈에서도 애타게 찾던 주공의 이름 ‘旦’과 같다. 아침 해’이며 ‘해 돋을 무렵’의 의미이니, 개국 군주의 이름자로는 최상이었을 터이다. 절묘하게 맞았다. 성인 공자로 하여 주공을 앞세웠으니, 일거양득의 묘수가 된 셈이다.

아단산(阿旦山), 삼국사기에는 ‘阿旦’이라 불렸다. 이후 한자 표기는 '阿且山' '阿嵯山' 등으로 혼용되었다. ‘旦’자가 바뀐 이유는 군주 이름에 대한 피휘(避諱)였다. 함부로 쓸 수 없는 관습이다. 위작 고려사가 만들어 지면서 한자 표기마져 '峨嵯山'으로 아예 바꾸어 버렸다. 창지개명된 ‘아차산’, 수려한 금수강산 이름이 곤두박질 친 것이다.

단초는 1413년 태종이 군현제(郡縣制)를 대 개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종의 신찬지리지로 이어지고 위작 고려사로 고착화했다. 우선 잃어버린 우리 이름 산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사달산(阿斯達山)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을 이름, ‘아침을 여는 산’ ‘해맞이 산’(阿旦山)으로 되돌려 보자. 고구리의 기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 高句麗의 아단성(阿旦城)으로 둔갑한 아차산(峨嵯山)     © 편집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의 초명은 몽란(夢蘭), 이후 몽룡(夢龍)이 되고 성인이 된 후 몽주(夢周)로 또 바뀌었다. 부친 정운관(鄭云瓘)이 꿈속에서 주공을 보고 개명했다는 이름이다.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본 유학자들의 뜻이 함축된 것이 아닌가. 주나라 건국 2천 4백 여 년 전의 꿈, 그 꿈속 주공을 그리다가 주공 이름 단(이성계)에 의해 비명에 갔다.

주 무왕의 조모가 임(任)이다. 큰 이름자라 하여 태임(太任)이라 불렸다. 그 ‘임‘을 스승으로 받들고 본받고자 하여 사임(師任)이라 하고, 그녀가 기거할 집(堂)이라 했다. 신성(申姓)을 붙여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탄생되었다.

무왕처럼 한 나라를 뒤집어 기업하라는 염원을 아들 율곡 이이(李珥)에게 담았을까? 당략에 따라서는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참으로 무서운 이름자이다. 율곡이 유학의 태두가 되었고, 그의 후학 계대가 확고부동했다는 점이 다행스럽게 작용되었을까? 이후 이를 두고 그 누구도 시비곡절을 논한 자가 없었다.

존주사상(尊周思想)은 곧 하늘사상이었고, 신생 조선의 몹쓸 자양분이 되었음이다.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 구걸하고, 기생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중용(中庸)에서 말했다. “하늘이 명한 것이 본성이고, 본성에 따르는 것이 도이다.” 이 구절을 보고 조선이, 또 사대부들이 ‘내가 본 주나라는 하늘이었고 본성이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외쳐댔음인가.


-한눌의 고대사 메모 수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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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7/17 [11:5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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