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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개벽동이주'에 담긴 주원장의 계략과 음모
상고시대를 개벽한 동이의 왕은 누구냐?는 물음에 환작된 기자조선
 
한눌 한문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8/21 [14:45]
 
1397년(태조 6) 3월 권근(權近 1352년~1409)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앞에 부복했다.
주원장은 어제시를 통해 “단군(檀君)이 떠난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하였는가 (檀君逝久幾更張)"라 하여 ‘단군 이후 묵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개혁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라고 힐책했다. 이어 "하늘 끝 땅 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라 하여 조선 또한 명나라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이어 주원장이 내린 협박성 교서(咨文)에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금후로는 사신(使臣)을 보낼 때에는 한인(漢人)의 말을 통하는 사람을 보내고, 한인의 말을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화(漢話)를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여 역사의 한계를 규정짓게 하겠다는 선언이다.

다음 글귀를 또 보자. “지금 조선 국왕이 왕씨(王氏)의 수가 다하고 하늘이 장차 운수를 고치려 함을 인하여, 인사(人事)는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천도(天道)는 위에서 응하여 삼한(三韓)을 차지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백성들이 저자와 시골에 안돈되어 의례(儀禮)는 본 풍속을 인습하고 법은 옛 헌장을 지키니, 나라를 가지는 도가 온전하여졌도다.”

“지금 조선에서 매년 표전(表箋)을 짓는 자가 문사(文辭)로 화를 얽으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비록 반드시 그렇게 여기지 않지마는, 산천과 위아래의 신지(神祗)가 아는 것이 있다면 화가 장차 올 날이 있어서 반드시 피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가 고구리를 지향했고 지켜왔던 역사의 맥이 절단되었음을 당연시 하고, 삼한이 한반도에서 일어났으며 고조선은 그 태두리 안에 있었다는 어깃장 난 논리를 펴 음모를 정당화했다. 또한 이를 어길시 좌시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좌측 사진처럼 말도 못하게 추남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인자한 표정으로 다르게 그린 어진     ©편집부

이어 주원장이 내린 시제(詩題) 24편 중, 권근이 쓴 시의 내용 일부를 보자.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에서 “성인 임금 용 처럼 일어나시어 만방(萬方)을 무수(撫綏)하시니, 먼 곳 사람 산 넘고 바다 건너 와서 조공합니다.” 라 했고,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에 대하여는,
“듣자하니 황막한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라 하고,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代)에도 한가지로 조선(朝鮮)이라 이름하였소.”라 했다.

신경지리(新京地理)에 대해 “구구한 지리를 무얼 말씀하리. 길이 황은(皇恩)을 입어 태평을 즐기오리다.”라 했다. 탐라(耽羅)란 제목에 대해서는 “말은 용의 씨를 낳아서 천한(天閑)에 들어갔다오"라 하여 ‘황제의 마굿간 제주도에서 말을 길러 그 중에서 뛰어난 말을 중국에 조공하였다’고 했다. 굴욕을 넘은 비굴함의 극치이다.

주원장이 ‘시고개벽동이주’라는 시제를 준 것은 어떠한 뜻일까? 이는 ‘상고시대를 개벽한 동이의 왕은 누구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고개벽주(始古開闢主)인 마고와 한인, 한웅의 역사를 말할 것인지 의도적 시험을 한 것이다. 답변 여하에 따라서는 생사를 가름하는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이었을 터이다.

마고와 삼성(三聖) 중 한인, 한웅 이성(二聖)은 피아간 금기시된 역사였다. 기자(箕子)의 대(代)로 연결 지었다. 신생 조선의 이름자는 고조선의 명맥이 아닌 환작된 기자조선의 조선임을 밝히고 있다.

건국전인 1390년(공양왕 2) 명사(明使) 진자성(陳子誠)를 파견, 개성 저잣거리에서 토지문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 대륙 기록을 없앴다.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시켜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아 천자(天子)의 기운을 끊는 등 사전 정비작업을 했다. 시제에 담긴 의미는 이를 재 점검하고자 하는 주원장의 계략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기화로 대륙을 기록한 고사서는 수거되어 사라지고, 구월산 삼성당은 하륜(河崙)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망가트려 졌다. 여타 시제의 답변내용과 비교, 판단하여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조선왕조 때 평양에 조성한 기자묘. 조선왕조는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의 맥을 잇는 조선이었다.     ©편집부

1488년(성종 19) 명나라 사신이 평양에 있는 단군묘(檀君廟)에 배례(拜禮)한 사례를 보자.
이들이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을 배알한 후, 단군사당에 배례한다. 기자를 황제 헌훤의 16세손(世孫)으로 만들어 끼워 넣으므로써 단군은 하위 계념이 되었다.

900년 후, 복생(伏生)이 상서대전(尙書大全)를 만들어 기자를 위대한 사상가로 탈바꿈시켰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정당화하기 위한 환작(幻作)이었다. 존주양이(尊周攘夷)의 틀에서 이조(李朝)는 明의 협박이 두려워  구월산 삼성당(三聖堂)을 자진하여 혁파했다. 고조선을 난도질하고 단군묘를 평양에 만들어  적당한 선에서 안무하면 그만이었을 터이다.

고구리산은 궐산(闕山)이라는 이름을 거쳐 구월산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되었다. 기준(箕準)은 바다 건너 한반도 익산(益山)에 터를 닦아 마한(馬韓)을 세웠다고 자랑했다.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아부했다.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오던 명사(明使)들은 ‘알아서 기는’ 그 진정어린 충정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모골이 송연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아픔은 진행형이다.
 
주원장이 단군을 알았으며 조선왕조가 단군을 숭상했다는 단순 기록의 이면에 비친 뼈아픈 역사의 뒤 안, 그 이중적 잣대를 면밀하게 파헤쳐야 올곧은 역사가 보일 터이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수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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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8/21 [14: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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