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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처럼 부풀어진 위·오·촉 삼국의 영토 (7부)
오나라의 도읍은 호북성 악주, 위·오·촉 삼국의 총인구는 천만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9/06 [14:51]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어낸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는 없거나 각색된 내용들이 많이 있다. 특히 대륙의 주인이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위·오·촉 삼국의 전쟁이 마치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 중국이 풍선처럼 부풀려서 그린 위·오·촉 삼국의 지도     © 편집부

관우의 고향은 하동군 해현(현 산서성 남부 운성시)으로 그는 원래 고구리 사람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관우의 원래 성은 고씨(高氏)로 당시 국가의 전매품인 소금을 담당하는 관리였는데, 자신의 약혼녀를 추행하려던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하게 된다. 결국 관우의 약혼녀는 자결하고, 관우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관헌의 추격을 받게 된다.

관우는 수년간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산에서 내려와 유곡관이라는 관문을 지나게 되었다. 관우는 유곡관에서 아직도 지명수배자인 자신을 검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지기가 “성이 뭐냐?”고 묻자, 관우는 즉흥적으로 유곡관의 끝 자를 따서 성을 관씨(關氏)라고 말하고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게 된다. 이후 성이 '관' 이름은 '우'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로 망명한 관우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탁현서 우연히 유비와 장비를 만나 의기투합하고는 촉한의 장수로 활약하게 된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었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했다”고 관우에 대해 평가했다.

손권은 형주(荊州)를 지키던 관우에게 사돈을 제의했다가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자신을 오소리에 비유하는 등 관우의 무례함에 분개했다. 손권은 장수 여몽에게 기습해 관우를 생포하라 지시한다. 손권은 자신의 누이가 유비에게 시집갔기에 웬만하면 관우를 살려주려 했으나, 관우가 손권에게 심한 독설을 퍼붓는 등 무례를 범하며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손권은 어쩔 수 없이 관우를 참수하고는 목을 조조에게 보내고, 조조는 관우의 목을 후히 장사지낸다.

이렇듯 2번이나 사로잡히고 결국은 목이 잘려 죽은 패장 관우를 소설 삼국연의의 과장된 내용대로 영웅으로 둔갑시켜 관제로까지 모시며 천하무적의 군신(軍神)으로 조작한 명나라의 행위는 그야말로 역사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의 관우상은 그야말로 역사왜곡인 것이다.   
 
오나라의 도읍 건업은 어디인가? 

중국백과사전에서는 관우의 묘에 대해 “삼국의 저명한 장령인 관우의 서열은 촉한 오호상장의 으뜸으로 서기 220년에 죽었다. 죽은 후 관우의 머리는 하남성 낙양(洛陽)에 장사지냈으며, 몸은 호북성 당양(當陽)에 묻혔다. 현재 낙양과 당양에 각각 관우의 무덤이 있다. 민간에 전래되기를 머리는 낙양을 베게 삼았고, 몸은 당양에 누워있으며, 혼은 산서성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 호북성 당양에 있는 관우의 몸무덤 관릉     © 편집부
▲ 하남성 낙양 관림(목 무덤)에 있는 황제 면류관을 쓴 관우     ©편집부

정사 <삼국지>에는 관우의 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관우의 무덤은 두 군데 있다고 민간에 알려져 있다. 조조가 참수된 관우의 목을 장사지낸 목 무덤인 관림(關林)이 하남성 낙양에 있고, 목 없는 관우의 시신은 형주 땅인 호북성 당양에 있는 관릉(關陵)에 묻혔다. 즉 이 말은 낙양이 당시 조조가 승상으로 있던 후한의 도읍이고, 관우가 지키던 호북성 당양 동쪽에 동오의 도읍이 있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손권의 도읍 건업이 양자강 하류에 있는 남경(南京)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저 멀리 동남쪽 남경에 있는 손권을 치기 위해 조조가 낙양에서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 중류인 호북성 적벽으로 올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적벽 부근에 동오의 도읍이 위치해야 역사적 스토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당시 손권의 도읍 건업은 호북성의 성도인 무한(武漢) 동쪽 바로 옆에 있는 악주(鄂州)였다. 무한은 무창(武昌)으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현재 악주에는 오왕성유적(吳王城遺蹟)이 남아있고, 시정부 차원에서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적벽이 위치하고 있으며, 적벽 서쪽에 관우가 지키던 형주 땅 당양이 있었던 것이다.

▲ 호북성 악주에 있는 손권의 오왕성 유적                                                                                              © 편
▲ 호북성 악주시에서는 매년 오나라 손권에 대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편집부

풍선처럼 부풀어진 위·오·촉 삼국의 영토

정사 <삼국지>에서 오나라의 인구가 52만호(약 300만 명)라 했으므로 악주를 중심으로 해 오나라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삼국 중 가장 컸다는 위나라의 인구가 66만호(약 400만 명)라 했으니 그 크기 역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한 즉 위·오·촉 삼국의 인구를 다 합쳐도 채 천만 명이 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광활한 중국 대륙에 당시 인구 천만 만이 살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즉 호북성 악주에 도읍을 둔 동오의 동쪽인 안휘성과 절강성에는 신라, 낙양 부근 허창(許昌)이 도읍인 위나라의 동쪽인 산동성에는 백제, 그리고 황하 북쪽 산서성과 하북성에는 조선의 적장자인 고구리가 버티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삼국의 대륙의 역사강역을 대륙에서 지우기 위해 명나라 때 각색된 것이 바로 나관중의 과대망상 역사소설 삼국연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역사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일제식민사관을 과감히 떨쳐내고 역사의 진실을 되찾아 중국의 동북공정을 극복하여 우리 민족의 웅대했던 대륙지배의 역사를 바로 써야 할 것이다.
 
▲ 위·오·촉의 총인구는 천만으로 대륙의 중앙에서 조그맣게 존재했다     ©편집부

평범한 장수에서 무신으로 둔갑된 관우

중국에서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전쟁의 화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관제묘(關帝廟)가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으로, 명나라가 조선의 임진왜란에 출정해 승리한 것이 관우의 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관제묘는 중국 각지에 세워지고 나아가 속국인 조선에도 관왕묘가 여러 곳에 세워졌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東廟)"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곳에 관우를 생포한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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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9/06 [14:5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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