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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과 高句麗역사 문제에 관하여 (1부)
중국의 견해를 제대로 전달하고,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중립적 발제
 
정인갑 전 칭화대교수 기사입력  2014/12/01 [13:27]

(편집자 주) 정인갑 교수의 발제 도중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가 나오기도 했는데, 구리시와 (사)고구리역사문화보전회가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정인갑 교수를 초빙해 발제를 듣고자 했던 이유는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공정의 실상을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였다.
 
정인갑 교수는 우리와 동포인 조선족임과 동시에 국적은 중국인이다. 정교수 입장에서는 잘못하면 중국정부로부터 심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 발제를 처음에는 거절했었으나, 주최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의 발제를 수락하게 된 것이다.

이번 발제는 정교수 입장에서는 목 내놓고 발제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인갑 교수를 통해 고구려공정의 실상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턱대고 흥분부터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부터 키워나가야 할 것이며, 허구 그 자체인 중국의 고구려·발해공정의 이론을 파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재정립해 나가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제2 발제문             고구려 문제에 관하여 (중국의 동북공정과 高句麗역사)
 
고구려 문제는 한중 두 나라 역사의 가장 큰 이슈의 문제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구려 문제에 관한 전반 상황에 대해 한국인들의 전면적 이해가 부족하다. 한국이 고구려 문제에 관한 중국의 사정을 전면적으로 알 필요가 절실하다.
 
필자는 북경대학 중문학과 고전문헌(文獻)전공을 졸업하고 또한 평생 고서의 연구와 정리사업을 하였다. 역사학전공이 아니므로 고구려 문제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북경대학 역사학과와 같이 중국통사를 배웠고 근무한 직장 중화서국(中華書局)은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 ½에 고전번역원을 합친 격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중국역사에 관해 알만치 알고는 있다. 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기본적인 것은 안다.
 
필자는 1918년에 이민한 중국조선족이다. 중국인이므로 중국의 입장을 존중하고, 중국의 견해를 잘 알고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조선족이므로 모국에 깊은 감정을 품고 있으며 중국이 모국을 공정히 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문제에 관하여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말할 수 있다.
 
1. 중국 고구려 문제의 유래와 발전
 
1949년 중공정부 성립부터 1960년대까지 중국의 모든 출판물과 역사 교과서에 고구려는 외국역사 즉 조선·한국사로 돼 있었다. 역사학대가 곽말약郭沫若, 당란唐蘭과 전백찬翦伯贊 등이 집필한 모든 역사책에 다 이렇게 취급돼 있다.
 
1963년 주은래 총리는 말하였다: 요하遼河와 송화강松花江 일대에 고대 조선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왕조가 조선을 침략하여 “당신네 땅이 너무 좁아졌다. 우리는 조상을 대신하여 당신들에게 사과한다.” “두만강, 압록강의 서쪽이 종래로 중국의 땅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 1964년 모택동도 이야기하였다: “당신네 땅을 내가 점령한 것이 아니다. 수양제隋煬帝, 당태종唐太宗과 무칙천武則天이 한 일이다. 당신네 변경이 요하 동쪽인 것은 봉건주의가 조선을 압록강 변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북한의 고고학자와 중국의 고고학자는 중국 동북삼성에서 고구려유적지에 대한 합동 발굴을 두 차례 진행했다. 발굴된 고구려 문화재는 모두 북한에 주었다. 고구려가 조선역사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등을 집필한 역사학가 김육보金毓黼가 처음으로 고구려가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와 문혁 때문에 이 견해가 학술계와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978년 필자가 북경대학에서 중국통사를 배울 때 교과서에 이미 고구려는 당나라 때 중국 동북변방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돼 있었다.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기는 아마 1970년대 중반부터가 시작이라고 짐작된다. 1979년 필자가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김영남 1등 서기관(현 북한 국회의장)과 같이 중국통사 강의를 들을 때 장전희張傳喜 교수는 고구려 부분을 뛰어넘었다. 김영남을 염두에 두고 한 처사일 것이다 (필자와 김영남은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아마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킴을 꺼렸거나 그 본인에게 다른 견해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3년 8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서 고구려문화 세미나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그 번 세미나에 한국인 80여 명, 북한인 4명 및 중국인 30여 명이 참가했으며 필자도 참가했다. 세 나라의 학자가 모두 고구려를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라고 주장하는데 연변대학 조선족교원들이 교묘하게 그런 내용을 빼버리며 통역하여 처음 이틀은 회의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사흘째 날 집안시 문물관리국장 경철화耿鐵華의 발언 때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경철화의 책에 ‘高句麗是中國歷史上地方少數民族政權(고구려는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서강대학의 모 교수가 중국어는 모르지만 한자를 알므로 그 뜻을 대충 터득하고 ‘이것 무슨 영문이냐’고 질문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경철화는 “중국 역사상의 한漢나라인이 꼭 지금의 한족漢族이라 단정하기 어렵고 일본 역사상의 아이누족이 꼭 지금의 일본인이라 단정하기 어렵듯이 역사상의 고구려인이 꼭 지금의 한국인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고구려인이 지금의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집착하지 말고 인류 공동의 문화재라고 보며 보존,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도 다소 왜곡하며 부드럽게 통역돼 그럭저럭 넘어 가게 되었다.
 
이때 침묵을 지키던 필자가 발언했다: “내가 알기로는 중국 사학계에서 고구려를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결정지었는데 금방 당신이 한 말은 당신 개인의 견해인가, 아니면 중국사학계의 견해와 결정이 변했는가?” 필자는 이 말을 중국어로 한번, 한국어로 한번, 두 번 말하였다.
 
필자의 질문에 경철화는 “당연 고구려는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다. 중국사학계의 견해나 내 개인의 견해도 이러하다.”라고 답하였고 이 말만은 왜곡할 수 없어 제대로 통역되었다. 이때 북한학자 박시형朴時亨이 단상에 나타나 아주 격렬한 어조로 발언했다: “당신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중국이 종래로 고구려를 조선역사로 취급하다가 지금 무슨 수작을 피우느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연속 패하고 그 때문에 수나라가 망했지? 당태종도 고구려 침략전쟁에서 패했지? 세상에 이런 지방정권이 있을 수 있나?” 장내의 한국인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때 요녕성遼寧省사회과학원 역사학자 손진기孫進己가 단상에 올라 박시형보다 더 격동된 발언을 했다. “고구려는 틀림없이 중국역사상 지방소수민족정권이다. 고구려인과 지금의 조선·한국인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장래 과학이 발전하면 중국인의 몸에서는 고구려인의 피가 검색될 수 있을지언정 조선·한국인의 몸에서는 고구려인의 피가 검색되지 않을 것이다.” 손진기는 너무 격동돼 부들부들 떨며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회의는 격렬한 싸움으로 이어질 조짐이었다.
 
중국조선사학회 비서장(사무총장) 풍홍지馮鴻志는 부득불 휴식을 선포하였다. 조금 지나 손진기는 실신되려 하여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실어 갔다. 풍홍지는 필자를 자기의 호텔방으로 데려갔으며 격분한 어조로 필자를 나무랬다. “당신 때문에 회의가 파탄됐다. 다시 수습하기는 어려워졌다. 더 하다가는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연변대학 조선족 강사들과 사전에 짜고 책략적으로 통역을 잘 해 무사할 줄 알았는데 당신 발언 한 방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면 왜 사전에 알리지 않았나?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킴이 떳떳하면 왜 한국인 앞에서 감히 말 못하는가? 마치 남의 예쁜 마누라를 훔쳐 살며 거들먹거리다가 그의 남편이 나타나면 뒷방에 숨겨놓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역사는 과학이므로 실사구시 해야 한다. 나는 당신네가 하는 행위에 동의할 수 없다.”필자의 변명이다.
 
“사실 중국·세계사학계는 100% 고구려를 조선사로 취급한다. 중국·중국사학계도 거의 다 조선사로 취급한다. 고구려를 중국사로 보는 학자는 김육보와 그의 제자 네댓뿐이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후 민족문제가 두드려지고 민족간의 전쟁이 빈발하니 위의 정치인들이 고구려 중국사화化를 선호하는데 우린들 무슨 수가 있나? 그저 함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풍홍지의 해석이다.
 
그 후 고구려 문제에 관한 논쟁은 끊임없으나 고구려 문제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차원에서 학술논쟁으로 취급하였지 국가에서 공식 태도표시를 한 적은 없었다. 2000년 10월 18일 중국의 언론 매체 총본부 중국신문출판총서中國新聞出版總署 산하 도서출판관리사司에서 <총편집통신總編輯通訊> 제5기를 발행하였다. 그 중 <사서辭書 중 올림말 “고구려”에 대한 해석은 역사사실을 존중하며 실사구시 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명확한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사서에 ‘고구려는 우리나라 고대 동북소수민족지방정권이다.’로 표기해야 한다. 이는 중국정부가 최초로 고구려에 대한 공식 태도표시를 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4개월 후인 2002년 2월 동북공정이 출범했으며 고구려 문제를 정식 국가 프로젝트로 다루기 시작했다. 상기 중국 고구려 문제의 유래와 발전을 요약하면
a. 1949년부터 1960년대까지 고구려를 조선사·한국사로 보았다.
b. 1960년경에 고구려를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c. 1970년대 중반부터 중국 역사교과서에 고구려를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취급하는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d. 2000년 10월 이전까지 고구려에 관한 국가공식견해가 없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은 각자 견해가 제 나름이었다. 고구려를 중국사로 보는 자는 극소수이고 한국사로 보는 자가 절대다수였다.
e. 2000년 10월 고구려를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견해를 국가공식견해로 규정지었다.
f. 고구려를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국책의 관철을 위해 2002년 2월 본격적인 작업―고구려공정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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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2/01 [13:2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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