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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본위로 본 고구려와 발해 문제 (4부)
발해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의 근거는?
 
정인갑 전 칭화대교수 기사입력  2015/01/07 [10:04]

4. 고구려 문제와 발해     

  한국인과 고구려 문제를 논할 때 발해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행위가 황당하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영토의 절반이 현 중국판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키는 처사에는 거의 근거가 없다. 그러면서 중국을 욕하는 것은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더럽다고 흉보는 격이다.     

  앞 절에서 제기한 바 있지만 이는 영토 본위의 원칙 때문이다. 한 개 나라가 자국의 국사를 서술할 때 마땅히 그 나라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판도범위 안에 제한시켜야 한다. 이는 현 국제사학계의 통념이다. 2003년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벽화와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벽화에게 유네스코는 모두 인류문화재의 인증서를 발급했다.

고구려 문제에서 영토본위로 이렇게 처사하면 옳지 않지만 이 처사를 통하여 국제사회의 영토본위의 원칙을 알 수 있다. 중국도 영토본위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다만 고구려 문제에서 이중 잣대를 쓰며 이 원칙을 제대로 관철하지 않을 따름이다. 한국사학계는 민족본위를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은 발상이다. 

  인류역사상 여러 개 민족이 한 개 나라를 세운 것도 있고 한 개 민족이 여러 개 나라를 세운 것도 있다. 한 개 민족이 세운 여러 개 나라 중 현재 자국의 판도 안에 위치한 것도 있고 현재 자국의 판도밖에 위치한 것도 있다. 현재 자국의 판도 안에 위치한 나라의 역사는 자국의 역사에 귀속시키고 현재 자국의 판도밖에 위치한 나라의 역사는 외국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 즉 역사는 영토가 첫째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민족은 그 다음이고 부차적인 요소이다.     

  영국인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미국 등의 역사는 외국역사이지 영국역사가 아니다. 현재 영국의 판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기자조선, 위씨조선, 진한, 태국, 헝가리, 싱가포르 등 나라를 세웠지만 모두 현재 중국판도 밖에 있으므로 중국사에 귀속시킬 수 없다. 몽고는 1948년에야 분리돼 나갔지만(중공의 공식 승인) 현 중국판도 밖에 있으므로 800여 년간 중국의 일부였지만 외국사로 취급한다.     

  신라, 고려, 조선 등 한반도는 1897년까지 중국의 지방정부(속국)이었지만 현 중국판도 밖에 있으므로 중국사에 편입시킬 수 없다. 한국인이 세운 단군조선, 마한, 변한, 신라, 백제, 고구려, 탐라, 가야…등은 한국사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판도 밖에 있는 발해만은 한국사에 귀속시킬 수 없다.     

  미국 등은 영국인이 계획적으로 조직하여 세운 식민지였지만 영국사에 넣을 수 없다. 발해를 고려가 계획적으로 조직하여 세웠어도 한국사에 넣을 수 없다. 하물며 발해는 나당(羅唐)연합군이 죽이고 붙잡을 때 다행히 겨우 살아남은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발해를 세우고도 철천지원수 당, 고려와 연락을 하지 않고 일본과만 연락을 하였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후 고려의 한 대신이 우연히 발해의 상층에 고구려 유민이 꾀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두만강 건너 쪽에 발해라는 우리 겨레의 나라가 또 하나 있더라. 앞으로 우리를 남국이라 부르고 발해를 북국이라 부르자.’ 그러나 상호간 행정적 관계는 없었다.      

  그래도 발해를 한국사에 넣을 수 있는가? 고구려유민이 세운 발해를 한국사에 넣을 수 있다면 백제유민이 세운 일본도 한국사에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발해가 일본과만 거래했다는 것은 사실은 일본에 건너가 나라를 세운 백제 유민, 즉 당년에 나당 연합군과 같이 싸운 전우―난형난제(難兄難弟)와만 거래했다는 말이다. 또한 만약 앞으로 DNA과학에 의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이 고대 한국인의 이민이라고 증명되면 아메리카의 수십 개 나라를 모두 한국사에 편입시킬 용기가 있는가?      

  김씨 가문의 아들 A를 박씨 가문에 양자로 주었으면 A는 박씨 가문의 족보에 오를 수 있지 김씨 가문의 족보에 오를 수 없다. 미국 등 나라의 예가 이와 유사하다. 만약 김씨 가문에 파벌 싸움에 망한 파벌의 몇몇이 다행히 살아서 박씨 가문의 수양아들로 들어갔으면 그들을 더욱 김씨 가문의 족보에 올릴 수 없다. 발해의 예는 이와 유사하다.      

  일언일폐지(一言一蔽之)하면 발해는 어쨌든 한국사에 넣으면 안 된다. 발해국의 고구려유민과 말갈유민간의 비례에 관하여 한·중 두 나라의 견해가 크게 다르다. 필자의 견해는 한국인의 견해를 수긍하더라도 발해는 한국사에 넣을 수 없다.     

  민족과 국가는 다른 개념인데 한국인은 민족=국가로 착각하는 수가 많다. ‘한자는 동이민족이 창조하였다’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자는 한국인이 창조하였다’는 틀린 말이다. ‘공자는 동이민족이다’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한국인이다’는 틀린 말이다. 동이민족의 90%(어림잡아)가 중국인이 되었고 10%가 한국인이 되었으므로 동이민족=한국인이 아니다. 최근 10여 년간 역사문화로 한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빈발하는데 한국인의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된 것도 있다.    

  국가와 국민의 개념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이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다. 2,000년 전의 시간에 팔레스타인은 유태인의 공간,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2,000년 후의 시간에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공간, 팔레스타인이다. 그런데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에 집결시켜 이스라엘을 재건하였다. 이는 인류 현대역사상 가장 황당하고 불행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60여 년간 그곳에서 누계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배출됐고 누계 부지기수의 사람이 죽었다. 지금도 그곳은 지구촌의 가장 격렬한 화약고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재건이 합리하다면 아래와 같은 일련의 일도 합리화할 수 있다. 한 1,000만 명의 일본인이 신라에게 쫓겨난 백제인이라며 충청도에 와서 백제공화국을 설립할 수 있다. 한 1,000만 명의 중국인이 신라에게 쫓겨난 고구려인이라며 북한에 들어가 고구려공화국을 세울 수 있다. 한 1,000만 명의 한국인이 요동에 들어가 당나라에게 쫓겨난 고구려인이라며 고구려공화국을 세울 수 있다…. 2,000여 년 전에 망한 나라도 재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는 1,300여 년 전에 망한 나라가 아닌가! 그러면 지구촌에는 수억 명의 난민이 생기며 수십, 수백만 명의 생명이 빼앗길 지도 모른다. 민족본위 역사관이 낳은 결과이다.      

  중국의 고구려공정에 한국의 원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30여 년간 많은 한국인이 동북삼성을 돌아다니며 “이거 다 옛날 고구려 땅이 아니가! 꼭 이 땅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라고 떠벌였다.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한국을 소개하는 중국어책자 <韓國한국>이 있다. 1~3년에 한 번씩 수정 인쇄하여 배포하곤 한다. 그 책자의 한국역사지도는 지금 한국보다 5배정도 크다. 발해의 국토를 첨가하며 흑룡강성(黑龍江省)과 길림성(吉林省)의 대부분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중국당국은 당연 이런 현상에 대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며 중국인은 참을 수 있겠는가? 고구려공정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지금 중국외교부 신문사에서는 한국기자의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와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 옛 발해 수도)의 공식 취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이 지역에 박대하고도 좋은 사업거리가 있어도 한국인에게 차려지기는 만무할 것이다.     

  필자가 중국인과 고구려 문제 처리의 부당성을 담론하려고 하면 중국인들은 다짜고짜로 발해를 거론한다. 그러면 필자는 말문이 막힌다. 한국사에서 발해를 포기하고 더 당당하고 떳떳이 고구려 문제를 들이대면 혹시 한국인의 뜻대로 해결될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비교적 이지(理智)적인 처사일 듯하다.   
                                                                                        2014년 11월 22일  
                                                                                        정 인 갑

     * 현 북한 국회의장 김영남은 1978년 9월부터 1979년 7월까지 필자의 반과 같이 중국통사 과목을 1년간 연수하였다. 강의 시간에 필자와 김영남은 항상 교실 맨 앞의 첫 줄에 앉군 하였다. 그때 김영남은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다.     

* 그 번 회의 때 박시형이 제출한 논문 제목은 <금해병서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대외관계>이었다. 논문 표지에 씌어진 박시형의 타이틀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원사·교수·박사이다.     

* 중국정부가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 중국어판 CHOSUN.COM을 봉쇄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다.


(편집자 주) 정인갑 교수의 연재를 마치며
정인갑 교수의 발제 도중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가 나오기도 했는데, 구리시와 (사)고구리역사문화보전회가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정인갑 교수를 초빙해 발제를 듣고자 했던 이유는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공정의 실상을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였다.
 
정인갑 교수는 우리와 동포인 조선족임과 동시에 국적은 중국인이다. 정교수 입장에서는 잘못하면 중국정부로부터 심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 발제를 처음에는 거절했었으나, 주최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의 발제를 수락하게 된 것이다.

정인갑 교수를 통해 고구려공정의 실상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턱대고 흥분부터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부터 키워나가야 할 것이며, 허구 그 자체인 중국의 고구려·발해공정의 이론을 파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재정립해 나가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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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1/07 [10:0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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