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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4부)
요수는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강임을 입증하는 여러 기록들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0/10 [14:14]
3. 고구려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현재 주류사학계에서는 요녕성을 흐르는 현 요하를 기준으로 하여 그 서쪽을 요서, 그 동쪽을 요동이라고 한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으로 맞는 이론일까? 한마다로 말해 현 요녕성 요하 요동·요서설은 일제의 창작물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작품이다.

  현재의 요녕성 요하 기준 요동·요서설은 일제식민사학이 창조한 역사이론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이 땅에 반도사관을 심은 조선왕조 때부터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의 “요하(遼河)는 (심양의) 승덕현 서쪽에 있다. 곧 구려하(句驪河)인데 혹은 구류하(枸柳河)라고도 한다.

《한서》와 《수경》에는 모두 대요수(大遼水)라 하였다. 요수의 좌우가 곧 요동ㆍ요서의 갈리는 경계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박지원의 생각은 과연 실제 역사적 사실에 맞는 걸까? 지금부터 고구려의 요동ㆍ요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덕흥리고분에 그려진 벽화.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13 태수의 모습     © 편집부

  1) 덕흥리 고분의 유주는 어디인가?
  1976년 북한 평남 덕흥리에서 고구려 때 무덤이 발굴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태왕 때까지 벼슬을 한 인물이다. 13명의 태수가 무덤의 주인공에게 하례를 올리는 벽화와 함께 발견된 아래 묵서명에 의하면 유주자사 진의 무덤은 사후 최소 200년 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무덤인지 아니면 멀리 중원에서 이장된 무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평남 덕흥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묵서명)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였다. 진은 77살로 죽어 영락 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의 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 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에 이르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원문)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 造欌萬功日煞牛羊酒 米粲不可盡[掃]旦食鹽[豆]食一記 [之][後]世寓寄4)無疆

▲ 덕흥리고분의 천장에 씌여 있는 묵서명                                                                                            © 편집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는 그의 고향 신도현은 산서성 임분이라고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信都县) : 汉置,为信都国治,三国魏擅冀州治,晋立南宫王子玷为长乐王,因改国长乐国,其后石赵、慕容燕、苻秦皆置冀州于此,隋初析置长乐县,省信都入之,仍为信都郡治,唐初复曰信都,为冀州治,后改国尧都(요도=임분),寻复故,明省入冀州,即今河北省冀县治。 
 
  가장 논란이 되어 온 것은 그가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묵서명에 있는 영락 18년이라는 분명한 명문 때문에 그가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중국은 그가 중국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내다 고구려로 정치망명한 사람이라는 어불성설의 주장을 했다. 덕흥리고분의 묵서명은 광개토태왕 때 요동군은 물론 유주 지역까지 다스리고 있었다는 명백한 유물적 증거인 것이다.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13명 태수의 지명은 ① 연군(燕郡) 태수 ② 범양(范陽) 내사 ③ 어양(漁陽) 태수 ④ 상곡(上谷) 태수 ⑤ 광령(廣寧) 태수 ⑥ 대군(代郡) 내사 ⑦ 북평(北平) 태수 ⑧ 요서(遼西) 태수 ⑨ 창려(昌黎) 태수 ⑩ 요동(遼東) 태수 ⑪ 현토(玄兎) 태수 ⑫ 낙랑(樂浪) 태수이고 1명은 판독 불능인 상태이다.에서 유주는 요서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탁군, 대군, 발해군 등 10개 군이다.
 
  덕흥리 고분과  『한서 지리지』 두 군데 다 있는 지명은 어양, 상곡, 북평, 요서, 요동, 현토, 낙랑의 7개 군이다. 이 군들이 바로 유주의 핵심 군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군들은 시대에 따라 유주에 편입되었던 인근 군이거나,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거나, 기존 군에서 분할되거나 지명이 변경된 군일 것이다.
 
  덕흥리고분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군(郡)의 태수, 주(州)를 다스리는 자사 등의 관직명이 중국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고구리에서도 사용한 관직명이라는 점이고, 고구리 일개 자사의 무덤이 공주 무녕왕 무덤보다 1.5배나 커서 당시 고구리의 국력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구려 광개토태왕 때의 유주가 중국의 주장처럼 북경 일대가 아니라 산서성 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되었고, 중원고구려비도 충주에서 발견되었으니 한반도는 분명히 고구려의 땅이었음이 확실하다.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는 논외대상이다. 즉 고구려 강역은 동쪽 한반도부터 남쪽은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패수까지로 실로 어마어마한 강역을 보유하고 있었던 대제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광개토태왕 때의 유주는 산서 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     © 편집부
   
▲ 광개토호태왕의 영락대통일도     ©편집부

  2) 고구려 때 요수는 어디인가?
  수양제와 당태종이 고구려로 쳐들어오면서 요하를 건넌 다음 바로 고구려의 관문인 요동성을 공격한다. 요동성은 요하 동쪽에 있는 성이라고 한다.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넌 다음 바로 그 동쪽에 있는 요동성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되므로 이론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자치통감』에서의 날짜별 당태종의 행적기록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정관 18년(644) 10월 14일(갑인)에 황제의 마차가 낙양으로 행차했다. 10월 29일(기사)에 민지의 천지에서 사냥을 했고, 11월 2일(임신)에 낙양에 도착했다. 장검 등이 요수(遼水)가 범람해 건널 수 없자 황상은 장검을 불러 낙양으로 오게 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즉 낙양과 요수는 무척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당시 요수가 현재 사학계의 이론대로 요녕성 요하였다면, 요수까지 갔다가 건너지 못하고 낙양으로 되돌아오려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십 수 개월은 족히 걸리므로 이 기록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당시 겨울에 범람할 수 있는 강은 아마 황하 뿐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 요수가 요녕성 요하라면 아마 얼음이 얼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113만 대군을 동원한 수양제의 경우도 별 차이가 없다. 1월 3일(계사일)에 제1군을 출발시키고, 하루에 1개 군을 출발시키는데 출발에만 40일이 걸렸다고 했으므로 2월 15일 경 출동이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는 수양제가 요수에 도착해 3월 14일(계사)에 총공격명령을 내려 요수 도하작전이 실시되어 고구려와의 전투가 개시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2월에 수양제가 요수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수양제가 수천 리나 떨어진 요녕성 요하까지 15일~1달 만에 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수양제나 당태종이 낙양에서 현 요하까지 오려면 그 사이에 수많은 강과 지명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사서에 기록된 지명이라고는 정주(定州) 하나 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어떻게 그렇게 그 먼 거리에 있는 많은 강들을 건너서 오는데 그렇게 빨리 요수에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요수가 현 요하가 아니라 낙양 부근에 있는 강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즉 현 주류사학계가 비정한 요수는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님이 명백해진다. 역설적으로 “고구려 때 요수는 낙양 북쪽을 흐르는 황하 또는 그 지류”라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 장안에서 출발한 당태종이 요하까지 왔다가 범람해 낙양까지 도돌아온 날짜가 20일 걸렸다면 당시 요하는 지금의 요하가 절대로 아니다.     © 편집부

  위 『자치통감』에 나오는 요수는 원래 우리의 요수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아마 중국에서는 낙양에서 가까운 그 강을 요수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요수는 『한서』지리지 ‘유주의 현토군조’에서 보듯이 “요산이 있고 요수가 나오는 곳인 고구려현에 있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한 요수와 동일한 강으로 보인다.

  『흠정대일통지』권121 요주(遼州)편에는 “요수: 일명 요양수라고도 하며 서장수라고도 하는데, 화순현 서북에서 발원하여 팔부령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흘러 주의 성 서남쪽으로 지나며 청장수에 들어간다. <수경주>에 요수는 요하현 서북쪽 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요하현 옛 성 서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속성에 이르러 청장수에 합류한다”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명나라 때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로 그려져 있다.

(원문) 轑水(遼水): 一名遼陽水又名西漳水源出和順縣西北入八賦嶺東流經州城西南入淸漳水 <水經注>轑水出轑河縣西北轑山南流逕轑河縣故城西南東流至粟城注於淸漳

▲ 명나라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그려진 요주와 요산은 산서성 동남부     ©편집부

  또한 장수(漳水)는 청(淸)장수와 탁(濁)장수가 합쳐져 흐르다 황하로 들어가는 강으로, 탁장수는 『수경』에 산서 동남 상당군 장치현에서 발원해 둔류현을 지나 장수로 들어가는 강이라는 설명과, 청장수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산서 동남에 있는 화순과 요현을 지나 북부 하남성 섭현을 지나 탁장수와 합쳐진다는 설명이 있다.

(탁장수) "(산서성 동남부) 상당군 장자현 서쪽 발구산에서 나오고, 장수는 발구산 남쪽 산기슭이 만나는 녹곡산에서 나온다. 탁장수는 동으로 진류현 남쪽을 흘러 그 성 동쪽을 지나면서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강수가 있다. 강수는 동북쪽으로 흘러 둔류현 고성 남쪽을 지나고 동북쪽으로 장수로 흘러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고,
(원문) 浊漳水出上党。长子县西发鸠山, 漳水出鹿谷山,与发鸠连麓而在南。东迳陈留县南,又屈迳其城东,东北流有绛水注之,绛水东迳屯留县故城南,东北流入于漳,

(청장수) "장하의 상류로 산서성 평정현 남쪽 대민곡이 발원지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의 경계로 흐르다 꺾여 남쪽으로 흘러 요현을 경유해 서장수와 합쳐져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탁장하와 만나 합쳐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清漳水: 漳河之上游也,源出山西平定县南大黾谷,西南流入和顺境,折南流迳辽县,合西漳水入河南涉县,与浊漳河合,《汉书地理志》沾县大黾谷,清漳水所出。
     
▲ <수경>에서  설명한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와 청장수의 물 흐름.   ©

 위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요수는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기록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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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10 [14:1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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