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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이 아닌 고구리 땅 현토군은 산서성 남부 (4부)
400년 중국의 식민지라는 한반도 한사군은 허구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0/20 [14:44]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의 기록에는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는 기록 이후 무려 9년간의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중·일 사학계는 위 미천태왕 3년 기록에 언급되는 현토군, 12년의 요동, 14년의 낙랑군, 15년의 대방군 모두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 한사군이며, 그 식민지가 이 땅에 400년간 줄기차게 존속되다가 미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 여부를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 중국과 같은 이론인 동북아역사재단은 그 존재가치가 없다.   ©

연혁으로 본 현토(玄菟)는 고구리의 땅

* “추모대제 13년(B.C 25) 병신 5월,  소서노 황후의 외가 오빠 을음을 현토태수로 삼아 남구에 머물게 하였다.”라는 기록과 “대무신제 9년(36) 병신 12월, 개마의 반중과 한인(漢人)들이 함께 구려성에 쳐들어오자 현토태수 구추가 달려가 구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고, 송옥구가 대신해 싸워서 이를 평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토는 처음부터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태조황제 10년(121) 신유 12월, 요광이 구려의 거수를 꼬드겨 현토도위로 삼고 비리의 반적 위구태와 함께 모의해, 자몽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천서에 새로이 현토부를 두고 거기에서 머물렀다. 이에 제께서 마한・개마의 1만 기병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가 잠시 현토를 잃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대제 “3년(167) 정미 2월, 유주의 공손역이 현토태수를 자칭하면서 구리(丘利)에 쳐들어와 화진이 이를 격파했다.”는 기록과 “5년(169) 기유 4월, 한나라 사람 경림이 현토태수를 자칭하고, 교현과 함께 구리의 땅에 쳐들어와 노략질했다. 화백이 이를 쳐서 물리치고 그들의 처자와 도인(圖釼)을 노획했다.”라는 기록에서 현토는 다시 고구리의 강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천태왕 “5년(231) 신해, 위나라가 공손연을 요동태수・거기장군으로 삼아 우리의 현토성을 기습했다. 우위장군 주희에게 명해 이를 쳐서 깨뜨렸다”는 기록과 “11년(237) 정사, 공손연이 스스로 연왕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태왕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할 계획을 상의했다.

위나라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 선비・오환과 함께 요대에 진을 치니, 공손연이 나와 이들을 격파했다. 관구검은 공손연과 다시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서 요수가 넘실대니, 군사를 잃을까 겁나 우북평으로 철수했다. 우리 군대가 이 허를 틈타 현토 서쪽의 땅 백 여리를 취했다”라는 기록과   
   
▲ 관구검과 전투를 벌인 비류수와 양맥곡(양수)                                                                   ©편집부

“18년(244) 갑자 7월, 관구검이 현토에 쳐들어와 노략질했다. 태왕이 보·기병 2만 명을 이끌고 나가 비류수의 위쪽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이라 한다.”에서 역시 현토는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구검과의 전쟁과 비류수와 양구의 위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2152) 참조)

또한 “중천태왕 12년(259) 을묘 겨울 12월, 갑자기 위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위위장군 목원으로 하여금 날랜 기병 5천을 추려 양맥곡에서 들이쳐서 대파했다. 위군의 장수 위지개를 목 베고 8천여 급을 베었더니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양곡대전이라 한다. 반적 왕간은 도주했다. 태왕은 목원을 현토태수로 삼고 부산공으로 봉했으며, 후에 마산공으로 바꾸어 봉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역시 현토는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천태왕 5년(274) 갑오, 서진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로 삼았다. 일설에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를 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토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서진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에서 서진이 임의대로 자기네 행정구역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현재 이북5도청을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     © 편집부

미천태왕이 빼앗은 성은 현토가 아닌 남소성
 
미천태왕은 즉위하자마자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2년(301) 신유 6월, 조문・창멱・뉴벽을 선장군(船將軍)으로 삼아 수군을 조련하고, 명림섭을 행군주부로 삼았다. 선방(12공신의 한명)이 대부의 우두머리 대발을 상선장군(上船將軍)으로 삼아 3명 선장군의 수군을 감독하도록 청하니 이를 윤허했다. 가을 9월, 두눌원에서 사냥하며 군대를 훈련하고 선방의 처 면씨의 고향에서 잔치를 열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3년(302) 임술 가을 9월 3일, 태왕이 친히 정예 3만을 이끌고 현도(玄菟) 땅으로 진군해, 15일에 남소(南蘇)성을 쳐서 빼앗았다. 남소는 본시 우리의 신성한 땅으로 관적(관구검)에게 빼앗겼다가, 혹은 우리가 혹은 저들이 아침에 차지했다가 저녁에 잃은 지 오래되었다. 태왕이 야인 시절에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며 지리・인정・성곽・해자와 허실을 상세히 살폈던 적이 있었기에, 선방을 대주부로 삼아 은밀히 토착민 우두머리들과 상통하면서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진군시켜 태수 경창 등 다섯의 목을 베고 8천인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미천태왕이 진군한 당시 현토는 고구리의 땅이었고, 현토에 주둔하면서 그곳에서 가까이 있는 남소성을 공격해 빼앗았다는 말이다. 즉 현토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남소성을 공격해 빼앗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남소성은 고구리와 위나라가 서로 뺏고 빼앗겼던 격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천태왕이 남소태수 경창의 목을 친 것으로 보아 당시 경창은 서진(중국)을 추종하는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삼국사기>에서는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한·중·일 삼국 사학계가 이 기록을 근거로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이 한반도에서 400년간 존재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고구리사초·략>이 없었더라면, 그들 주장의 허구를 밝혀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다음 연재에는 미천태왕이 빼앗은 남소성의 위치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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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20 [14:4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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