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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의 도성들은 압록수 변에 있어야 (5부)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요서군에 있다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0/27 [16:59]
 3) 고구려의 도성들은 압록수 변에 있어야

 
▲ 현재 사학계의 이론인 고구려 도읍지     ©편집부
주류사학계는 한사군의 현토군 땅인 졸본(집안 오녀산성)에서 고주몽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고, 유리왕 때 국내성(집안)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환도성(집안)을 도읍으로 한 적도 있으며, 장수왕 때 남진정책으로 한사군의 낙랑군 땅이었던 평양성으로 천도했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게 나라가 망했다고 하면서 이것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고 하고 있다.

고구려 도읍에 대한 『삼국사기』 ‘잡지 지리’에는 산상왕 13년(209)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기고, 동천왕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고, 고국원왕 12년(342) 환도성으로 다시 이거했다가 13년(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과 환도성이 있다는 집안현을 가보면, 산길을 따라 거의 외길인 저 깊숙한 분지에 위치한 곳이 과연 대제국 고구려의 도읍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국내성터를 둘러보면서 누구나 "설마 이렇게 후지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성터가 대륙을 호령했다는 고구려의 400년 수도였을까?"하는 의혹을 누구나 가져보았을 것이다. 마치 제주도 성읍민속마을에서 보았던 읍성보다도 작게 느껴졌을 것이다. 과연 이렇듯 협소한 곳에 고구려의 수도로서 왕궁과 관청, 그리고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 고구려의 도성으로는 너무도 좁고 외진 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위성사진                                       © 편집부

  『삼국사기』 외에 고구려의 도성에 대해 기록한 중국의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서는 고구려 때 압록수와 도성에 대해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서안평에서) 海로 흘러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압록수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반도사관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으로 서안평을 그 하구인 단동으로, 국내성을 압록의 북쪽인 집안으로, 평양성은 압록수가 아닌 대동강의 북쪽에, 안시성 역시 압록수가 아닌 요하변이라고 비정했다. 이는 『신당서』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는데,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을까?

▲ 현재 사학계의 반도사관으로 비정된 고구려의 성들                           © 편집부
▲  <신당서>의 기록대로 그린 고구리의 도성들                                         © 편집부

 4) 고구려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보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에 ‘河北盧龍 夷齊故里’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곳을 백이·숙제의 고향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중국정부는 진황도시 노룡현 중심지에 있는 산에 비석 2개를 세워놓고 그곳이 수양산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가짜수양산은 높이가 채 10m도 채 되지 않는 낮고 자그마한 동네 뒷산이라 고사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곳 주변 고성터를 영평부(永平府) 즉 기자성(箕子城)이라고 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이다.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 백이숙제의 고향이라고 알리고 있는 입간판     © 편집부
▲ 영평부(기자성)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다고 선전하고 있는 중국     © 편집부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중국의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과 이를 그대로 수용한 조선왕조의 중화모화사대주의 학자들과 이를 체계화한 일제식민사학에게 속아 현재의 요녕성 요하의 동쪽이 요동이고 그 서쪽을 요서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요동과 요서는 원래 어디였는지 추적해보기로 하겠다.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이고 갈석산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조선과 고구려의 강역과 고대지명을 밝히는 핵심 중의 핵심 열쇠라고 할 수 있다. 허신의 『설문』에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와, 『한서 지리지』에서 유주의 요서군(遼西郡)에 속한 14개현에 대한 설명 중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였고, 수양산이나 고죽성을 찾으면 요서군의 위치가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수서』 배구열전의 기록에 황문시랑 배구가 수양제에게 고하길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의 땅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습니다.”라고 했다. 즉 고죽국이 있던 요서지역이 바로 기자의 봉지였고 한사군의 땅이었으며 나중에 고구려의 영토라는 말인 것이다. 또한 『대명일통지』에 의하면, “영평부 15리에 고죽군의 나라로 봉한 땅이 있다. 또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고 말한다. 이곳은 기자가 봉해진 땅이고, 가까운 곳에 고죽국이 이웃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죽국과 기자의 봉지(한사군)가 서로 인접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대청광여도에 산서성 서남부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묘     © 편집부

 수양산이 어디인지 가장 확실하게 밝힌 기록은 『사기 집해』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지방의 포판에 있는 화산의 북쪽에 있고, 그곳은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의 하동(河東)은 황하의 동쪽으로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라는 설명이다. 위 기록을 입증해주는 고지도가 바로 대청광여도(大淸廣餘圖)로 황하가 꺾이는 동쪽에 수양산과 포판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으며, 백이·숙제의 묘라는 글자까지 있다. 바로 이곳이 요동·요서하는 고구려의 요서군이었던 것이다.

  2008년 그곳에서 백이·숙제의 실제무덤이 발견됨으로써 기록이 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수양산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인 롱서(隴西)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사기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기를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와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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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27 [16:59]  최종편집: ⓒ greatcorea.kr
 
천문지리를 확인해야 한다.. 아리랑 15/11/03 [10:34] 수정 삭제
  晋天文上을 확인해보면 西河、上郡、北地、遼西東入尾十度(서하,상군,북지,요서,요동은 미10도에 속한다). 미10도는 경양부,옛 북지군과 상군이 겸한 곳이다(慶陽府古北地郡兼得上郡地入尾十度)..

바로 현재 감숙성 동쪽부터 섬서성 북부를 지역임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http://m.blog.naver.com/gogoarirang/22068776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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