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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태왕이 정벌한 남소성은 어디인가? (5부)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에 속한 남소성은 원래 고구리의 땅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1/17 [15:23]
302년 9월 미천태왕이 친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한 현토(玄菟)는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고, 현토에 주둔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남소성을 공격해 빼앗았다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되어 있다. 미천태왕이 친정해 남소태수 경창의 목을 친 것으로 보아 당시 경창이 서진을 추종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삼국사기>에서는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한·중·일 삼국 사학계가 이 기록을 근거로 이 당시까지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이 한반도에서 400년간 계속 존재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조작된 400년 한반도 한사군 이론                                                                   © 편집부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남소성의 연혁

먼저 남소성의 연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 15년(345) 겨울 10월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을 시켜 공격해 와서 남소(南蘇)를 빼앗아 파수병을 두고 돌아갔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나, 문맥으로 보아 남소성은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남소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많은 기록들이 있다.
* “대무신제 9년(36) 병신 12월, 구다 왕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음을 듣고는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섬니의 아들인 후린은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겨주었지만,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다. 소쾌가 죽자 구문을 돕고는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했었으나, 이 일이 발각되어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졌고 그 도읍도 남소(南蘇)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리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리게 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후린이 다스리던 구다국의 도읍이 고구리의 남소 땅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신명선제 14년(86) 을유 5월 남소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태조황제 4년(115) 을묘 2월, 서하(西河)・남구(南口)・하성(河城)・안평(安平)・장령(長岺)・토성(菟城)・둔유(屯有)・평곽(平郭)・고현(高顯)・하양(河陽)・남소(南蘇)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역시 남소는 고구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언급된 11개 성 하나하나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① 서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887 참조

② 남구는 “상곡군에 속한 거용관의 남쪽 입구의 땅의 고지명이다(南口之地当居庸关南之口, 故名, 后魏曰下口, 北齐曰夏口, 元时始称南口, 有城)”라는 설명과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상곡군에 속한 거용현에 관문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남구는 상곡군에 속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上谷郡 상곡군) 秦置。莽曰朔调。属幽州(속 유주)。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潘,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관문이 있는 거용현)。雊瞀,夷舆,莽曰朔调亭。宁,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③ 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이름으로 보아 황하 주변에 있는 성으로 보인다.

④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안평군에 대한 설명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심수현 동북 60리(安平郡: 后魏置,后废,故治在今山西沁水县东北六十里)”라고 되어 있으며, 아래 산상대제 14년 기록에서 보듯이 안평성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는 성이다. 

⑤ 장령에 대해서는 “장령현은 당나라 때 발해군의 장령부의 땅이다(长岭县: 唐时渤海长岭府地)”이라는 설명으로 보아 당시 유주의 발해군이 있던 산서성 동남부로 보인다.

⑥ 토성은 현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환우기>에서 언급한 “《寰宇记》 菟氏城在尉氏县西北四十里”의 토씨성(菟氏城)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토씨성은 황하 남부 개봉시 남쪽에 있는 위씨현이라 하므로 아닌 것 같아 보인다.

⑦ 둔유는 낙랑군에 속한 현 이름이고 현재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둔유(屯留)현이 확실하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 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둔유),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⑧ 평곽과 고현과 서안평은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들로 기록되어 있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속 유주)。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고현),安市(안시현),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평곽현),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현),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⑨ 하양성에 대한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하양에 남성, 북성, 중단성의 3성을 쌓았는데, 현재 황하북부 하남성 초작시 맹현(맹주시)이다.”라고 한다.
(河阳三城 하양삼성) 在今河南孟县,元魏、北齐之际,于河阳筑南城、北城、中潬城三城,唐置河阳三城使,以附近各县租赋入之,视为重地,李光弼保此以御史叫明,旋改置节度使,宋以后废,《河南通志》北城,后魏太和中筑,齐使潘乐镇于此,今孟县是也,又使高永乐守南城以备西魏,今孟津是也,中潬城,东魏元象元年筑,今夹滩是也。
          
▲ 태조황제 4년(115) 유주에 쌓은 11개성의 위치는 모두 산서성 남부     © 편집부

* “산상대제 14년(210) 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河陽城)은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南蘇城)의 서쪽에 있는 안평성(安平城)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新城)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안평성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고 안평성의 북쪽에 신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동양대제 12년(238) 무오,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燕)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해 5천병을 이끌고 남소(南蘇)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했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해졌다. 상이 대노하여 사마의와의 교통을 끊었다.”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은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소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남소성(南蘇城)은 일명 동요하(東遼河)라 불린 남소수가 흐르는 곳에 있는 성이다. 남소수는 아래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현토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흐르는 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구리의 땅이었던 남소성은 현토군에 속한 성으로, 관구검의 침공 때 잠시 잃었다가 서로 뺏고 빼앗겼던 격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 현토군 : 한나라 무제 4년에 설치했다. 고구려현을 왕망이 하구려현이라 불렀다.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45,006호, 인구는 221,845명,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의 3개현이 있다.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고 서남쪽으로 요대까지 흘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역시 남소수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요새 밖으로 흘러간다. 상은대현은 왕망이 하은이라 했다. 서개마는 왕망이 현토정이라 했다. 마자수(압록수)는 서북으로 염난수에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을 지나고 2,100리이다.

(원문) 玄菟郡 : 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고구려),莽曰下句骊。属幽州。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县三:高句骊,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남소수),西北经塞外。上殷台(상은대),莽曰下殷。西盖马(서개마)。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에 있던 낙랑·현토군의 지명이 이동된 지도     © 편집부

남소성은 유주에 속한 현토군 지역을 흐르는 강에서 지명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소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유주 즉 산서성 남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남소성에 대한 설명을 아래에 인용하는데, 지금의 요녕성 흥경현이라는 설명은 왜곡된 설명이다. 

(번역) 남소성 : 요녕성 흥경현 경계에 있다(역사왜곡). 고구려현이 치소이다. 진나라 영화 원년(345)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현을 공격해 빼앗았다가 돌아왔다. 당나라 건봉 2년(667) 설인귀가 고구리를 깨고 남소·목저·창암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현경(고종) 중에는 남소주를 설치했다가 후에 폐했다. <청일통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소주의 안복군을 고구리 남소주라 했다. 소주는 즉 지금의 금주이다. 현 <한서지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현에 남소수가 있고, 고구리가 강 이름에서 가져와 성을 설치했다. 신성 동남 지금의 흥경의 경계에 있고, 금주에 없다.

(원문) 南苏城 : 在辽宁省兴京县界,高句骊置,晋永和元年,燕王皝使慕容属攻高句骊,拔南苏,置戍而还,唐乾封二年,薛仁贵破高丽,拔其南苏、木底、苍岩诸城,显庆中置南苏州,后废,《清一统志》按辽志以苏州安复军为高丽南苏州,苏州,即今金州也,今考汉志高句骊县有南苏水,高丽置城,盖因此为水名,在新城东南今兴京界,不在金州。

또한 <통감주>에 “신성 서남쪽에 방산이 있고, 동북쪽으로 남소성·목저성 등과 접한다(《通鉴注》 新城,西南傍山,东北接南苏木底等城)”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은 신성(新城)의 동북쪽에 접하는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면 저절로 남소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재에 신성(新城)과 남소성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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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17 [15:2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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