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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가 있었던 신성은 어디인가? (6부)
남소성의 서북쪽에 있는 신성은 산서성 남부 곡옥현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1/30 [13:46]

신성(新城)은 우리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668년 고구리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성에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때문으로, 최초 설인귀(薛仁貴)가 수장으로 있었던 안동도호부는 676년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듬해에 신성으로 옮겨져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이 통솔한 적이 있는 성이기 때문이다.         
        
▲ (좌)교과서의 안동도호부 이동 (우)KBS 드라마 대조영에서의 안동도호부 수장 설인귀     © 편집부

 신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302년 9월 미천태왕이 친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현토(玄菟)로 진군한 후 공격해 빼앗은 남소(南蘇)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신성의 위치를 추적해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역사기록에서 신성과 남소성은 지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고구리사초·략>에 언급된 신성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산상대제 14년(210) 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에 있는 안평성(安平城)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의 서북쪽에 신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통감주>에 “신성 서남쪽에 방산이 있고, 동북쪽으로 남소성·목저성 등과 접한다(《通鉴注》 新城,西南傍山,东北接南苏木底等城)”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은 신성의 동북쪽에 접하는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성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다음과 같이 여러 군데가 나타나는데, 이들 중 과연 어디가 고구리 미천태왕이 빼앗은 신성일까? 

(번역) 신성 : ① 춘추시대 진의 땅. <좌전 희공 4년> 태자가 신성으로 달아났다. <두주> ‘신성  곡옥’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동쪽 20리
  ② 춘추시대 정의 땅. <춘추 희공 6년> 여러 제후들이 정을 정벌해 신성을 포위했다. <두주> ‘정의 신밀, 현 영양 밀현’ 하남성 밀현 동남쪽 30리에 있는 옛 밀성
  ③ 춘추시대 송의 땅 <춘추 문공 14년> 동맹을 신성에서 맺었다. <두주> ‘송의 땅, 양나라 곡열현에 있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서남
  ④ 춘추시대 진의 땅. <좌전 문공 4년> 진후가 진을 정벌해 원신성을 포위했다. <두주> ‘진나라 읍’ 지금의 섬서성 징성현 동북쪽 20리에 고신성이 있다.
  ⑤ 요녕성 흥경현 북쪽(역사왜곡), 진나라 함강 5년(339) 모용황이 고구리를 쳐서 병사들이 신성에 이르자 고구리가 동맹을 원하기에 돌아왔다. <통감주> 신성 서남쪽에 방산이 있고, 동북쪽으로 남소·목저성 등과 접한다.
  ⑥ 산서성 대동시 삭현 서남에 있다. <사기 진기> 장양왕 3년 몽염이 이족을 공격해 신성을 넘었다. <통전> 제나라가 삭주고성의 서남 신성을 치소로 했다. 일명 신평성이고, 후에 마읍으로 옮겼다.
  ⑦ 호북성 양양현 동남 10리. (이하 생략)
 
(원문) 新城 : 春秋晋地,《左传僖公四年》太子奔新城,《杜注》“新城曲沃”在今山西闻喜县东二十里。春秋郑地,《春秋僖公六年》诸侯伐郑,围新城,《杜注》“郑新密,今荥阳密县,” 今河南密县东南三十里有故密城。春秋宋地,《春秋文公十四年》同盟于新城,《杜注》“宋地,在梁国谷热县西,” 在今河南商丘县西南。春秋秦地,《左传文公四年》晋侯伐秦,围元新城,《杜注》“秦邑,”今陕西澄城县东北二十里有古新城,秦谓之新里,为秦取梁地,《春秋地名考略》 新城,即梁国之地,秦取之,战国时为秦公子封邑。在辽宁省兴京县北,晋咸康五年,慕容皝击高句丽,兵及新城,高句丽乞盟,乃还,《通鉴注》新城,西南傍山,东北接南苏木底等城。在山西朔县西南,《史记秦纪》庄襄王三年,蒙夷攻赵新城,《通典》齐置朔州于故城西南新城, 一名新平城,后移马邑。在湖北襄阳县东南十里,《宋元通鉴》 咸淳三年, 砟贵援襄樊,殛术谓诸将宜整形舟师以备新城, 明日, 贵舟果趋新城。

위 7개의 신성 중 미천태왕이 정벌한 신성은 ①의 <두주>에서 말한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동쪽 20리에 있는 곡옥현에 있는 신성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서주(西周)시기 진국(晋國)고성으로 알려져 있는 10만m² 면적의 ‘곡옥고성유적’이 바로 고구리의 신성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문희현은 동천태왕 때 고구리를 침공해왔던 위나라 장수 관(무)구검이 태어난 고향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145 참조)    

▲ 신성은 산서성 남부 임분시 곡옥현에 있는 성으로, 현재도 곡옥고성이라는 명칭으로 남아있다     © 편집부

<고구리사초략>으로 본 신성의 연혁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아래와 같이 신성의 연혁을 알아봄으로서 신성이 이전에 고구리의 강역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영토였는지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 “산상대제 14년(210) 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에 있는 안평성(安平城)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가 처음으로 신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 “중천대제 20년(267) 정해 4월, 두눌원의 주 호구를 신성으로 유배 보냈더니, 호구가 관나와 몰래 연통하였다. 일이 드러나서 관나의 평자를 주살하려 했더니,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내치기만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호구를 유배 보낸 신성은 고구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서천대제 7년(276) 병신 여름 4월, 책성으로 가서 신성을 순시하고, 태후 및 황후와 더불어 흰 사슴을 잡았다. 제는 태후가 애썼기 때문이라 하였고, 태후는 황후가 애썼기 때문이라 하였다. 8월에 환도했다.”라는 기록과 

“19년(288) 무신 4월, 책성에 거동해 신성을 새로 고쳤다. 옛 성책이 퇴락했기 때문이었다.  동해곡의 태수 상개보가 고래눈알을 바쳤는데 어두워지면 빛이 났다. 8월, 동쪽으로 수렵을 나가서 흰 사슴을 사로잡았는데, 9월엔 지진이 있었다. 11월에 신성에서 돌아왔다.”라는 신성은 고구리의 강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서천왕 7년 여름, 왕이 신성에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 신작이 궁정에 모여들었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처음 쌓여졌을 때부터 신성은 고구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미천태왕이 이를 정벌했고 이후 신성은 계속 고구리의 강역으로 역사기록에 남아 있었다.
      
▲ 지명이동으로 인해 고구리의 역사강역인 황하이북의 중원 땅을 모두 잃어버렸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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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30 [13:4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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