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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은 어디일까? (7부)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알려진 서안평은 원래 산서성 하진시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12/14 [13:49]
<고구리사초·략>을 통해 알아본 결과 한사군이었다는 현토군은 추모대제 때부터 줄곧 고구리의 영토였다가 태조황제 10년(121)에 반란자들에게 넘어갔다가, 48년 후인 신대제 3년(167)에 그들이 토벌됨으로써 다시 고구리의 땅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한나라 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400년 한반도 한사군의 허구가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동천왕 16년(242)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해 깨뜨렸다”라는 기록 뒤에 위장 관구검이 침략해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으며, “미천왕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있어 중국의 땅이었던 서안평을 미천왕 때 되어서야 겨우 빼앗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런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은 어떤 곳인가?

<삼국사기>에 ‘요동의 서안평’이라고 말한 이유는 <한서지리지>에 서안평현은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이라는 기록 때문이다. 또한 서안평은 유주의 현토군 설명에서 “마자수(압록수)는 서북 염란수로 들어가 서남으로 서안평으로 흘러 海로 들어간다. 2개 군을 지나며 길이는 2,100리이다”는 문구에서 압록수와 해(海)가 만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한·중·일 사학계는 이러한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라는 이유로 단동(丹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압록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8544 참조)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 압록수와 해(황하)가 만나는 서안평과 안민성     © 편집부

또한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대진국의)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쪽은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서안평을 찾으면 대진국(발해)의 서경압록부 즉 요나라 상경임황부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상경임황부는 대진국(발해)을 무너뜨린 요나라 시조 야율아보기가 세운 초기도읍지로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빠린줘치(巴林左旗)에 있다고 하나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다. 안민현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역) 안민성은 산서성 양원현 북쪽 10리에 있다. <통감>진나라 영화 12년 상당사람 풍앙이 연의 태수 단강을 축출하고 의거한 곳이다. <통감주>“양원현에 있는 안민성은 개 영가 중 류곤이 장기를 보내 수축했고, 상당의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는데서 이름을 얻었다.” 연의 모용준과 후위의 임금의 시초에 상당군 모두를 일찍이 이곳에서 다스렸다.
 
(원문) 安民城 在山西襄垣县北十里,《通鉴》晋永和十一年。上党人冯鸯逐燕太守段刚,据安民城,《注》“安民城在襄垣县,盖永嘉中刘琨遗张倚所筑,以安上党之民。因以为名。” 燕慕容儁及后魏皇始初上党郡皆尝治此。 
               
▲ 단동으로 그려진 서안평과 집안으로 그려진 발해의 서경압록부               © 편집부

<고구리사초략>으로 본 서안평의 연혁

(1) “대무신제 28년(55) 을묘 2월, 개마(盖馬)・하성(河城)・구리(丘利)・고현(高顯)・남구(南口)・자몽(紫蒙=곤도昆都)・구려(句麗)・거란(車蘭)・하양(河陽)・서안평(西安平) 등 10성을 쌓아 한나라와 선비족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서안평은 고구리의 초기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구리와 자몽(곤도)와 거란은 현재 알 수 없는 지명들이다. 개마와 구려는 아래 현토군에 속한 서개마현과 고구려현과 같은 현으로 보이며, 고현과 서안평은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이고, 하성과 남구와 하양에 대해서는 아래 컬럼을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9858

(玄菟郡 현토군) 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 曰下句骊。属幽州(속 유주)。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县三:高句骊(고구려),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西北经塞外。上殷台(상은대),莽曰下殷。西盖马(서개마)。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참고로 위 대무신제 28년(55)의 기록은 <삼국사기> 모본왕 2년(54)에 기록된 “봄,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했다. 그러나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라는 기록과는 약간 다르나 분명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모두 유주에 속한 지명들이기 때문이다.

(2) “태조황제 30년(141) 신사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현도태수 을어가 그를 쳐서 죽였다. 낙랑태수 룡준이 서안평에 쳐들어오니, 안평태수 상잠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신안(新安)과 거향(居鄕)까지 추격해 장언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유주로 도망해 들어갔다.”라는 기록에서 낙랑태수가 서안평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보아 서안평은 고구리의  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거향의 위치는 알 수 없고, 신안은 낙양 서쪽으로 나오는데 맞는지 여부는 현재 알 수 없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의 “태조대왕 94년(146)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라는 기록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사초·략>에서는 서안평을 고구리 땅으로 기록했고, <삼국사기>에서는 한나라 땅이었던 서안평을 고구리가 습격한 것으로 기록했다는 것이 다르다.

(3) “산상대제 원년(197) (황위 경쟁에서 밀린) 발기가 공손도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 공손도는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척하면서, 개마・구리・하양・현토・둔유・장령・서안평・평곽군 등을 엄습하여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 않자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가 서안평을 공손도에게 잠시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상대제 9년(205) 을유 4월, 진서장군 주설에게 명해 서안평을 정벌케 했는데, 평호(平湖)에서 싸우다가 장군 10명이 죽었다. 태왕께서 남겨진 자식들을 위무하고 처들에게는 녹봉을 주었다. 주설의 아들 주희를 우림교위로 삼고 공주를 처로 주니, 주희는 스스로 나서서 변방의 장수가 되었고 원수도 갚았다. 7월, 주곡을 진서대장군을 삼아 서안평을 정벌해 빼앗았다.”라는 기록에서 8년 만에 잃어버린 서안평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상대제 14년(210) 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고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 안평성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손강이 쳐들어온 서안평은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동양대제(동천태왕) 16년(242) 임술 여름 5월, 임금이 친히 5도의 장군인 방축・회고・주희・현・목장 등을 거느리고 십만 병사를 이끌고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이다. 애초에 위나라의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었다. 이제 그 설비를 파괴해버렸더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언제인지는 모르나 빼앗겼던 서안평을 고구리가 다시 되찾았음을 알 수 있다.             
               
▲ 역사왜곡을 위해 중국이 제멋대로 지명이동시킨 고구리의 서안평     © 편집부

<삼국사기>와 비교되는 <고구리사초략>

<삼국사기>에 “미천왕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라는 간단한 기록만이 있으나 당시 서안평이 고구리의 영토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고구리사초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미천대제 12년(311) 신미 봄 3월, 고노자가 아들 경을 들여보내 요동이 정벌하기 좋은 상황임을 주청하자, 태왕은 방부와 선옥에게 명해 보·기 5만을 이끌고 신성태수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발하게 하고는 현토인 삼성과 안평인 가회를 선봉으로 세웠다. 8월, 방부 등이 진군해 서안평을 빼앗고, 그 곳의 남녀 2천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겨왔다. 태왕은 포로들을 받고는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선옥을 안평태수로 삼았다. 10월, 태왕이 주황후와 순행해 안평으로 가서 사졸들을 위로하고, 고경을 안평소수로 삼아 서안평을 다스리게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삼국사기>의 간단하고도 잘못된 역사기록 때문에 원래 고구리의 고유영토였던 서안평을 중국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서안평이 워낙 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리가 항상 소유하지 못하고 간혹 뺏기기도 했으나 고구리의 영토였던 때가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래 서안평은 지금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단동이 아니라 황하와 분하(옛 압록수)가 만나는 산서성 서남부에 있는 하진(河津)시였던 것이다. 이는 고구리의 역사강역을 축소·은폐시키려고 저지른 중국의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이를 비판이나 검증 없이 그대로 수용한 한국의 강단사학계도 사실 문제가 많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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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14 [13:49]  최종편집: ⓒ greatcorea.kr
 
발해의강역 ㅎㄱㅇ 15/12/14 [23:40] 수정 삭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안쪽의 바다, 발해만의 이름의 기원이 무었인가?
왜놈들이 동해를 지덜 나라 이름을 붙여 일본해라 우기는 것도
지덜 나라의 서쪽 해안이 접해있으니까 우기는 것이고...
왜놈들의 국력이 지난 100여년 이래 우리나라보다 좀 쎄다고
전 세계에다가 일본해라고 우기고 있는 와중인데,
발해국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바다를 발해라 부를 수 있었을까?
발해만이 발해란 이름을 지니려면,
발해국이 발해만을 최소한 절반 이상을 접하고 있어야 그리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려면 발해국의 영토는 백두산 동쪽이 아니라
요서지방, 최소한 지금의 텐진까지는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발해만이 발해만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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