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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커져 고구리의 맞상대가 된 모용황 (2부)
모용외와 모용황의 발호와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과 맞상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5/31 [15:33]
미천대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고국원제는 문무를 겸비하고 성품이 자애로워 나라 안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안위를 묻고 늙고 병든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었던 인자한 임금이었다. 게다가  태후의 항문에 종기가 나자 직접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또한 교서를 내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복희씨 시절 경작해야만 먹고 입었던 시절과는 같지 않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관리 및 백성들과 무위도식하는 자들 모두는 땅을 일구고 열심히 누에치기를 하시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만약 대외적인 상황만 순탄했더라면 그는 마치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고국원제의 전반기에는 모용선비를 일으킨 모용외가 333년에 죽고 호전적인 37세의 장자 모용황이 뒤를 잇고는 337년에 연(燕)나라를 자칭하며 용틀임을 하고 있었으며, 후반기에는 영웅 근초고왕이 346년에 등극해 백제 역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즉 당시 주변국들이 너무 강적들이었던 것이다. 선하고 어진 세종대왕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격이었다. 결국 주변상황 때문에 고국원제는 고구리 역사상 가장 비운의 황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고구리 고국원왕의 모습     © 편집부

모용씨의 분열

그나마 모용황 형제들이 서로 분열한 것이 큰 다행이었다. 모용한은 이복동생 모용황이 자기  처를 빼앗자 같은 선비족인 단씨에게로 도망쳤고, 모용황과 사이가 갈라진 동생 모용인은 형의 죄를 들먹이며 고구리에 사신을 보내 청혼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크게 노해 자신이 직접 출전해 양평(襄平)을 쳐서 차지했고, 요동의 큰 성씨 집안들을 극성으로 옮겼고 군을 요동의 상(지방장관)으로 삼았다. 이에 모용인이 신창(新昌)을 습격해 왕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모용황이 려(黎)에서 얼음이 언 강을 건너 동쪽으로 행군해 동생 모용인을 습격해 평곽(平郭)에서 붙잡아 죽이자, 그의 부장들이 고구리로 도망쳐온다. 기묘년(미천 20년, 319)에 최비의 일이 있었던 이후 모용외는 모용인을 요(遼)에 두어 좋은 계책을 얻은 격이었으나, 필경에는 서로들 싸우고 죽여서 없앴으니, 이를 두고 ‘날래고 사나운 고양이가 밤눈 어두웠던 격’이라고 했다.
(요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3006 참조)

▲ 명나라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있는 요와 요산     © 편집부

위에 언급된 양평, 신창, 평곽은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유주의 요동군에 속해 있는 현들이다. 신창은 때로는 요서군에 속하기도 했으니 요동군 내에서 서부에 있는 현으로 보인다. 요수의 북쪽을 요양이라 하는데 역시 요동군에 속한 현이고, 려는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 려성(黎城)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모용황의 형제들이 고구리 바로 앞마당에서 막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유주에 속함)。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신창),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평곽),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고국원제는 모용황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사신을 동진에 보내 모용황이 동생을 죽이고 형수와 놀아난 죄를 처벌할 것을 송사했으나, 동진에서는 모용황을 두려워해 감히 죄를 논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드디어 337년 모용황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니, 바로 370년까지 33년간 지속하는 역사에서 말하는 전연(前燕)인 것이다. 선비족의 일개 부족이었던 모용씨가 이제는 나라까지 세울 정도로 세력이 급격하게 커진 것이다.

독불장군이 되는 모용황

모용황은 화친을 맺은 갈족 후조(後趙)의 석호와 함께 단씨를 공격하니 다급해진 단씨는 귀순한 모용한으로 하여금 대적케 했으나, 모용한은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는 모용황에게 투항하고 죄를 청하고 만다. 모용황은 “형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모용한의 계책으로 단씨를 격파하고는 땅을 많이 빼앗는다. 그러자 석호가 대노하며 모용황과 맞붙어 싸우니, 이에 낙랑의 많은 현들이 돌아섰고 태수 역시 극성(棘城)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석호가 장군 조복을 고구리로 보내 모용황과의 싸움에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고국원제는 군량이 바닥나 그럴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조복이 300척의 배를 동원해 군량 300만석을 청주로 보내면서 그 중 30만석의 군량을 점선(黏蝉)으로 보내오고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오니, 어쩔 수 없이 군사 3만을 안평(安平)으로 보내고는 장수에게 관망만 하지 움직이지는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점선은 낙랑군에 속하고, 남소는 현토군에 속한 현이다.
(남소 위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9858 참조)
                 
▲ 양평·신창·평곽은 요동군 지역, 안평·남소·신성은 현토군 지역     © 편집부

이는 마치 광해군이 강홍립 장군에게 밀명을 내린 것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과 싸우면서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광해군 입장에서는 임진왜란 때 신세를 진 명나라의 청을 거절할 수 없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3,0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투항했다. 강홍립은 청군과의 교전에서 궁수들로 하여금 촉이 없는 화살을 쏘도록 지시해 명나라를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를 후금에 알렸다고 한다. 
         
▲ 현명했던 임금 광해군과 명나라와의 사대주의를 고수하려다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인조     © 편집부

석호가 도읍인 극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다급해진 모용황은 모용한의 처를 돌려보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에 모용한과 장수들이 열심히 싸워 결국 후조의 군대를 흩어지게 만들자, 석호는 고구리에서 원병이 오지 않음을 알고는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모용황의 아들 모용각이 석호를 추격해 3만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반란을 일으켰던 성들을 복구하고 땅을 넓히면서 범성(凢城)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모용황이 단씨와 석호를 모조리 격퇴해 이제는 상대가 없는 독불장군이 되어버린 격이었으니, 그 다음 칼끝은 고구리로 향하는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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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5/31 [15:3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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