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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황의 위장술에 속아 패주하는 고국원제 (3부)
서진하려는 고구리와 동진하려는 전연의 예견된 충돌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6/15 [16:12]
8년(338) 가을 8월, 고국원제는 동황성(東黃城)에 명을 내려 역졸 5천인을 환도로 보내 오룡궁을 수리하라고 명했으며, 낙랑인 2천과 대방인 1천 및 부여인 2천에게는 동황성을 수리하게 했다. 동황성은 평양의 남쪽에 있으며 본시 백제 땅으로 신라와도 가까이 있던 까닭에, 신라와 백제가 서로 화친하면서도 이곳을 차지하려 했다. 상은 이곳을 밀도(密都)로 삼고 그 성의 해자를 견고하게 해 진의 남쪽을 요충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동황성의 추정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554 참조)

이듬해 정월 드디어 모용황이 대거 쳐들어오자 신성성주 왕자 고인이 성을 버리고 물러나니, 고희에게 서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라고 명했으나 이기지를 못했다. 여름 5월, 상은 동생 고민을 신성으로 보내 모용황과 화친을 약속하고는 평곽태수를 인질로 삼게 했다. 모용황이 고구리로 귀순한 봉추와 송황을 내놓으라고 심하게 재촉하니 상이 입장이 곤란해져 이들을 도피시켜버린다.

고국원제가 모용황에게 사자를 보내 표피와 황금을 뇌물로 주고 동생 고민을 돌려달라 요청하니, 얼마 후 고민이 과부였던 모용황의 여동생과 혼인해 돌아와서는 “모용황이 왕녀 3명을 보내주기를 청하옵니다.”라고 고하자, 상은 딸 둘과 여동생을 모용황에게 데려다주라고 명했다. 10월에 방상이 남소를 지켜냈고, 우성이 신성을 지켜냈다. 이듬해 2월에 상이 동생 고민과 세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백양 3천두를 뇌물로 주니 붙잡혀있던 오충과 조문을 돌려보내준다.
(남소성과 신성의 위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0275 참조)
            
모용황의 도읍 용성은 어디인가?

340년 모용황은 흑룡과 백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며 노닐다가 용산에 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남쪽에 성을 쌓아 용성(龍城)이라 하고 새 궁을 지어 화룡(和龍)이라 했다. 용산 위에 용삭불사(龍朔佛寺)를 세워 대신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관학으로 삼았다. 이어 아들 모용각을 시켜 고구리의 평곽을 공격해 상호간에 큰 격전이 벌어지니 결국 고구리가 물러나고 만다. 모용각은 계책의 일환으로 옛 관리들을 위무해 오래도록 눌러 살게 했다고 한다.
                             
▲ 김제 벽골제에 있는 흑룡과 백룡 조형물                                                                                              © 편집부

고국원제의 등극부터 지금까지의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없고, <고구리사초략>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들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시켜주고 모용황이 연나라를 세우고 도읍으로 한 용성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자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수경주>에서 대요수(大遼水)의 물길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백랑수에 대한 아래 문구이다. 

“백랑수 역시 동북으로 용산의 서쪽을 경유한다. 연나라 모용황이 유성 북쪽에 있으며 용산 남쪽에 있는 복지에 양유로 하여금 용성을 축성하고 유성을 용성현으로 개명했다. 12년(348) 모용황이 흑룡과 백룡을 용산에서 친히 보고는 이백보를 걸어가서 소·돼지·양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두 용이 머리를 교차하고 기쁘게 날다가 뿔을 떨어뜨려 잃어버렸다. 모용황은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신궁을 화룡궁이라 부르고 산 위에 용익사를 세웠다.”라는 문구이다. 
 
(원문) <水經註> 白狼水又东北迳龙山西,燕慕容皝以柳城之北、龙山之南,福地也,使阳裕筑龙城,改柳城为龙城县,十二年,黑龙、白龙见于龙山,皝亲观龙,去二百步,祭以太牢,二龙交首嬉翔,解角而去。皝悦,大赦,号新宫曰和龙宫,立龙翔祠于山上。” 
                      
<수경주>의 백랑수 설명기록은 위 <고구리사초략>의 내용과 절 이름만 다르고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용성은 바로 유성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성은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현토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의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토성을 쌓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노룡은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요서군에 속한 비여(肥如)현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지명대사전>에서 마수산을 검색하면 “마수산은 산서성 신강현 서북 40리에 있고, 속명 말머리 산으로 현재의 화염산이다. (马首山 : 在山西新绛县西北四十里,俗名马头山,《张州志》左传赵盾田于首山,即此,一名火炎山。”라고 나온다. 따라서 용성은 현토군 지역인 곡옥현에 있는 신성의 북쪽과 임분시(평양성) 남쪽 사이에 있는 양분(壤汾)현 일대로 추정된다. 즉 모용황의 새 도읍은 고구리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함)。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유성),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비여=노룡),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연나라 도읍 용성으로 추정되는 양분현 일대는 안평성 바로 북쪽     © 편집부

연나라의 위장술에 속아 패하는 고국원제

12년(342) 임인 8월, 고국원제는 서진하려는 뜻으로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겼다. 10월에는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했다. 모용황은 동진하고자 했고 고구리는 서진하려고 했으므로, 두 세력은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 실제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용황 입장에서는 먼저 고구리를 평정한 후 우문선비마저 멸한다면 그야말로 중원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고구리를 공격하라는 신호탄이 올랐다.

당시 환도성으로의 진군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기에 북쪽 길로 진군하자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모용한이 “적은 상식적으로 우리 대군이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히 여기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셔서 기습을 하신다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손발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모용황이 그 작전에 따르기로 했다.

11월,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아 남쪽 길로 진군했고, 별도로 장수 왕우에게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면서 대군처럼 보이도록 철저히 위장했다. 이 때 고구리는 과연 어떻게 움직였을까? 고국원제는 모용황의 대군이 북쪽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동생 무(武)에게 정병 5만으로 북쪽 길을 막으라고 명했으며, 자신은 늙고 약한 군병으로 도읍(환도)을 지켜 남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런데 연나라 병사들이 느닷없이 사천(蛇川)과 니하(泥河)로 다가오더니 대군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어왔고, 모용한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다. 연이어 모용황의 대군이 도착하니 고구리가 대패해 아단(阿旦)성과 안평(安平)성 등이 모두 함락되고, 우룡장군 아불화가 힘을 다해 황산(黃山)에서 싸우다가 적장 한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은 숫자가 많고 고구리 병사들은 적으니 도저히 지켜낼 수가 없었다. 고국원제는 그때서야 적의 주력군이 남쪽으로 왔으며 저들의 술책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상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평양으로 가려고 했다가 적장 한수 등이 매우 급하게 다가오기에, 산림 속으로 숨으려 던 차에 장수 해발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막아내 간신히 필마단기로 단웅곡으로 피신했다. 과연 도주하던 고국원제가 적에게 사로잡힐 것인가? 고구리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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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15 [16:1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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