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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영락대통일'의 의미 (1/8)
북부여를 계승한 위대한 대제국 高句麗의 초기 강역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7/05 [12:48]
(본 시리즈는 8부작으로 연재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중국의 일방적인 역사왜곡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우리의 高句麗와 대진국(발해)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이 엄청난 음모에 이론적으로 전혀 대항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동북공정에 대해 울분을 느낀 소수의 인원들이 모여 중국대사관 앞에서 몇 차례 기자회견이나 소규모 피켓시위를 하는 정도이다.
 
그 이유는 이 나라 사학계의 이론이 일제식민사학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의 역사교과서 이론으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론적으로 대항하고 막아내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역사이론으로 어찌 강대국의 무자비한 역사왜곡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고구려 전성기 장수왕 때 영토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라는 문구는 있으되,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이 어디까지 정복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단지 장수왕 때 남하정책으로 압록강변 집안에 있는 국내성에서 대동강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 전성기 때인 장수왕의 강역도 한반도와 만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북한사학계에서 덕흥리고분과 북경 부근에 고려영(高麗營)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이유로 “광개토태왕이 북경 부근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또한 ‘영락대통일’이라는 역사용어는 재야사학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역사교과서만 그럴까? 국민들에게 파급력이 엄청나게 큰 역사드라마는 어떠한가?
최근 두 차례 광개토태왕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안방극장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으나, MBC 태왕사신기는 태왕의 삼각관계 연애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다 끝났고, KBS 광개토태왕은 역사적으로 작은 나라였던 후연(後燕)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해 高句麗와의 전쟁 맞상대로 그렸다. 두 드라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高句麗는 결코 위대한 나라가 아니었고, 광개토태왕은 전쟁광일 뿐 위대한 정복군주는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스스로 엄청난 역사왜곡을 했다는 말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러하니 중국이 제멋대로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진실은 국사교과서나 드리마와 같지 않다.
위대했던 高句麗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고 그 역사를 새롭게 인식해야만 중국의 역사침탈인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사복원의 핵심에 위대한 大高句麗의 광개토태왕이 계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강역을 제대로 밝히고 그 분의 통치 철학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가. 大高句麗 광개토태왕의 강역

우리는 흔히 광개토태왕을 동양의 알렉산더대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은 알렉산더대왕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후에 몽고의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단군과 광개토태왕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후예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광개토태왕의 실체를 밝힘에 있어 가장 애로사항은 사료의 부족이라 하겠다. 

사학계에서 정사서라고 하는 <삼국사기>에도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그 진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 500년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변조 왜곡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 내용의 전부이다. (참고로 적이 쳐들어와 방어한 기록은 생략했다.) 

원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 10성을 빼앗고,
9월 거란을 쳐 500명을 사로잡고 만 명의 高句麗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4년 8월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무너뜨리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11년 후연의 숙군성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13년 11월 후연을 침범하였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어떻게 광개토태왕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삼국사기>는 정치적인 이유로 상당부분 누락.축소된 기록이 많은 문제 있는 사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기록이 누락 되었고 또 실제 광개토태왕의 치적은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자세히 추적해보기로 한다. 우선 광개토태왕 시절의 최대 강역을 밝히려면 그 이전의 高句麗의 강역을 알아야 한다. 

1. 高句麗의 초기 강역 확장

<환단고기> 기록에 따르면, 고주몽성제는 B.C 79년 음력 5월 5일 동부여에서 탄강(誕降)하셨다.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 땅으로 오시어 B.C 58년 장인이었던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뒤를 이어 등극한다. 추모대제(고주몽)께서는 B.C 37년 高句麗로 국호를 바꾼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B.C 58년은 출생일로, B.C 37년을 高句麗가 건국된 해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환단고기> 기록이 옳은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삼국사기>에도 <환단고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추모대제 이후 큰 정복전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강역이 엄청나게 광활했던 것을 보면, 고구려는 단칸 셋방에서 출발한 신규업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어마어마하게 큰 재벌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추모대제(주몽)께서는 년호를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인 다물(多勿)로 하여 활발한 정복전쟁을 시작해 행인국, 북옥저를 없앴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 황제들은 추모대제의 뜻인 다물정신을 이어받아 고토였던 광활한 조선의 옛 강역회복을 국가의 기치로 내걸었다.
 
▲ 추모대제의 등극식 장면. 고주몽은 북부여 7대 단군으로 등극한 후, 국호를 高句麗로 바꾼다.

 
2대 유리명제를 거쳐 3대 대무신제로 오면서 광활했던 조선의 강역을 상당부분 되찾는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의 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 모본왕 2년(49년) 기사로 나와 있는 “한의 북평, 상곡, 태원, 어양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고, 개마를 토벌하고 동부여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의 옥저와 낙랑군의 정벌이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환단고기>가 다음과 같이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 대무신제 28년(65년) 개마, 구려 .... 서안평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위 요서 10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쌓은 성인지는 알 수 없다. 서안평(西安平)은 한나라와 高句麗가 국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충지로 사서에 서로 뺏기고 빼앗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 KBS 역사스페셜에서 소개한 당태종과의 안시성 전투. 안시, 요동, 건안, 요택 등이 소개되었으나 이는 식민강단사학계의 반도사관의 이론이다.     ©편집부

8대 신대제 때는 “한나라 대군(10만)과 싸워 말 한 필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이 있었으며,
고국천제 때에는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같이 쌓였다”라는 좌원친전이 있었다.
 

<고구려사초.략> 13대 서천대제 5년(274년) 기록에 “진(晋)이 유주(幽州)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 범양, 상곡, 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일설에는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토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다. 교위, 태수, 참군을 허설 하였으니 역시 웃을 일 아니겠는가?”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진(晋)나라는 실제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고구려 일부 영토의 행정구역 개편과 관리를 임명했다는 역사왜곡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쉽게 얘기하면 대한민국에서 이북5도 도지사를 임명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위 기록에 언급된 유주, 평주(주)와 북평, 상곡, 태원, 어양, 요서, 요동, 범양, 낙랑, 현토(군)와 안시, 건안, 요택, 개마, 구려, 서안평, 창려, 대방(현) 등은 과연 어디일까? 

▲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 10성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요서 10성은 유주 즉 산서성 남부에 있던 성들이다.
 

곧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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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7/05 [12:4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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