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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라이벌 모용황의 죽음과 백제 근초고왕의 등장 (4부)
태후와 미천제의 시신까지 모용황에게 인질로 잡힌는 고국원제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6/29 [22:20]
연나라 왕 모용황이 직접 지휘하는 강병 4만이 남쪽 길로 진군해 고구리로 들어와 기습하니, 늙고 약한 군졸들로 도성을 지키고 있던 고국원제가 대패해 도주하던 중 적장 한수가 추격해 와서 상이 잡히기 일보직전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 때 고구리 장수 해발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막아내 고국원제는 단웅곡으로 간신히 피신했고 적들은 추격을 계속해 그곳을 포위했다.

인질로 잡힌 주태후와 미천제의 시신

연나라 장수 모여니가 도읍인 환도성에 입성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주태후를 사로잡는다. 이때 고구리 군사들이 연장 왕우와 북쪽 길에서 싸워 적을 모두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그럼에도 도성이 함락되고 태후가 잡혔다는 소식에 고국원제가 통곡하자, 신하들이 위로하며 “북쪽으로 간 군대가 왕우를 깨고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어, 적들이 편치 않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계시면서 사직을 보살피옵소서.”라고 아뢰었다.

우리 장수 우신이 계곡 안에 숨어있던 복병으로 단웅곡을 포위한 적들을 깨자, 상은 몰래 단령을 넘어 평양성에 이르렀다. 모용황은 비록 고군분투해 깊숙이 들어오긴 했으나 고국원제를 잡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상의 동생 민과 고희 및 해현 등을 평양성으로 보내 서로 만나자고 청했으나 상은 그들을 평양에 있으라 명하고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수가 모용황에게 “고구리 땅은 술병(戌兵: 변방을 지키는 군사)을 두어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고 있으나, 우리가 철수한 후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들을 수습할 겁니다. 이는 필시 우리에게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고구리 왕의 아비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리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돌려줘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고한다. 

고국원제가 총선장군 면강으로 하여금 수군 3만을 이끌고 강구(江口)를 차지하고 여러 차례 모용황의 군대를 격파했고, 상의 동생 무의 대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용황은 화가 치밀어 미천릉을 파헤쳤다. 극진한 효자인 고국원제는 모친 주태후가 천수를 누린 후에 미천릉에 합장하려고 문을 봉하지 않았기에 적들이 손쉽게 미천제의 시신을 탈취했던 것이다.

모용황은 궁실을 불태우고 도성을 훼손했으며, 남녀 백성 1만을 잡아가고 모든 재물과 보물도 거두어 돌아갔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남녀 5만 명을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군이 퇴로를 막으려 하자 모용황은 주태후에게 조서를 내리라고 협박해 고구리군과 백성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상 또한 잡혀있는 주태후와 여러 후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가 없었기에 모용황의 군대는 아무 탈 없이 자기네 땅으로 돌아갔다.

고국원제 13년(343) 계묘 봄 2월, 고국원제는 동생 민을 모용황에게 보내면서 진기한 물건 천여 개를 주니,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미천제의 시신과 왕후들은 모두 돌려보내 주었으나 주태후만은 인질로 잡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상이 태후에게 효성이 지극했음을 알았음이다. 가을 7월에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사신을 동진에 보내 모용황의 무도함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각색된 <삼국사기>에는 “왕이 아우를 시켜 연에 들어가 칭신(稱臣: 신하라 일컬음)하고 진귀한 보물 천여 종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 요녕성 조양시에 있는 모용황 주조상. 모용황의 도읍 용성=요녕성 조양은 중국의 명백한 역사왜곡     © 편집부

모용황의 죽음과 전연의 쇠퇴

이듬해 모용황은 친히 우문선비를 정벌해 남라(南羅)성주를 죽이고 승승장구로 진격해 그 도성인 자몽천을 빼앗았다. 우문씨의 추장은 막북(漠北)으로 도망쳤으며 모용황은 그곳의 가축과 산물 및 재화를 거두었고, 그 부의 무리 5천여 부락을 창려(昌黎)의 벽지 1,000리로 옮겼으며 남라성을 위덕(威德)성이라고 개명했다. 이듬해(345) 을사 10월에는 연나라 모용각이 고구리의 남소성(현토군)을 협공해 빼앗고는 파수병을 두고 돌아갔다.

남라는 호북성과의 경계에 있는 하남성 신양(信陽)시 라산(羅山)현 일대로 회하 상류이다. 창려는 아래 연혁에서 보듯이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서군에 속한 교려(交黎)현 또는 해양현(海陽)현의 다른 이름이고 북평군 비여(肥如)현에도 속했던 땅으로 산서성 남단이다.   
 
(연혁 원문) 昌黎: 春秋时属肥子国,战国为燕国地。秦属辽西郡。汉时在县南置絫县,属幽州辽西郡,后汉省入海阳县,亦属辽西郡。三国魏、晋因之。北魏仍属辽西郡,为海阳县地。北齐省辽西郡入北平郡,省海阳县入肥如县,遂为北平郡肥如县地。隋开皇六年(586年)省肥如县入新昌县,十八年(598年)改新昌县为卢龙县,遂为北平郡卢龙县地。唐属河北道平州,为卢县地。唐朝中叶营州柳城县曾寄置于此。辽太祖为安居定州俘户置广宁县(治今城关镇),隶属南京道营州,为州治,同时设营州邻海军于此。金皇统二年(1142年)废营州,广宁县改属平州;金大定二十九年(1189年)改广宁县为昌黎县(据传,为黎民百姓昌盛兴旺之意),属中都路平州。元时昌黎县属中书省永平路。世祖至元二年(1265年)省抚宁县、海山县入昌黎县;三年复置。至元四年(1267年)又以抚宁、海山二县入昌黎县;至元七年(1270年)复置,又省昌黎县、海山县入抚宁县。至元十二年(1275年)复置昌黎县,并省海山县入焉,属滦州;大德四年(1300年)昌黎县改属永平路。
 
▲ 요서군에서 분리된 북평군은 산서성 남단     © 편집부
                 
고국원제 18년(348) 무신 9월, 모용황이 사냥을 나갔다가 신을 만나 갑자기 죽었다. 동생 민이 문상 후 돌아와서는 “모용황이 요수(遼隧)로 나가서 온천에서 목욕을 하다 짐승 여러 마리가 보이기에 활로 쐈더니,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이 나타나 ‘여기는 사냥터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모용황은 그가 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화를 내며 ‘누군데 감히 내가 사냥하는 것을 말리느냐?’라고 대꾸하고는 말을 몰아 물을 건너 들어가 사냥하던 중, 흰 토끼 한 마리에 이끌려 돌투성이인 계곡에 들어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모용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준은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350년에 유주 일대를 점령하고 기주를 공격했고, 352년에는 염위(冉魏)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점령했으며 황제에 즉위했다. 353년에는 업(鄴)으로 천도 후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360년에 모용준의 뒤를 이어 모용위가 즉위했는데 나이가 어려 백부 모용각이 섭정했는데, 그 기간에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모용각이 367년에 죽자 모용평이 실권을 잡고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부터 국력이 쇠퇴해졌고, 370년 전진의 침입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전연은 멸망했다.

백제의 대영웅  근초고왕의 등장

346년 병오 9월, 백제에서는 분서왕의 맏아들인 계왕이 즉위 3년 만에 죽자, 비류왕의 둘째 아들 근초고(近肖古)가 뒤를 이었는데,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식견도 있었다. 이듬해(347) 정월 근초고왕이 단을 쌓아 천지에 제사하고, 처족 진정을 조정의 좌평으로 삼아 정무를 크게 바꾸었다. 진정은 성품이 삐뚤어져 사납고 어질지 못해 정사에 있어서는 가혹하며 짜잘했고, 권세를 믿고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 신하들과 백성들이 괴로워했다고 한다.

▲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의 모습                                                                 © 편집부

참고로 분서(汾西)라는 왕호는 그의 출생지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일대이다. “(번역) 분서현 : 한나라 체현, 후한 이후 영안현, 북제 임분현 겸해서 분서군, 명·청 모두 산서성 평양부(임분), 지금의 산서성 하동도)” 
(원문) 汾西县 : 汉彘县地,后汉以后为永安县地,北齐分置临汾县,兼置汾西郡,隋废郡,改县曰汾西,唐末迁徙无定,宋移归旧治,即今治也,明清皆属山西平阳府,今属山西河东道。

고국원제가 이를 듣고는 좌우에게 이르기를 “근초고가 감히 천자 노릇을 하고 있고, 진정의 행실 또한 이러하니 벌해야 되지 않겠소.”라고 하니, 상도가 “나라에는 세 가지 귀한 것이 있는 바, 그 하나는 신(神)이요, 그 둘은 임금(君)이며, 그 셋은 신하(臣)입니다. 백제 임금이 죽어 새로운 이가 대신하고 있으나 근초고는 멀리 볼 줄 아는 식견이 있고 조상도 숭상하며, 진정은 인망을 얻지는 못하고 있으나 재간이 능하니 준비 없이 갑자기 토벌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아뢰니 토벌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고국원제의 치세 전반기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연나라의 모용황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고국원제의 치세 후반기를 어렵게 만들고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가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백제의 근초고왕이다. 가히 영웅다운 체격과 용모에다가 식견 또한 뛰어났으니, 세종대왕 같은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고국원제에게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그야말로 앞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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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29 [22:2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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