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대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태후가 인질로 잡혀 잠시 연나라의 제후가 된 고국원제 (5부)
연나라에게 온갖 굴욕적인 수모를 당해도 참아야만 했던 고국원제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7/15 [14:42]

348년 모용황이 죽은 이후 연나라는 고구리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국원제의 모후인 주태후가 인질로 잡혀있어 고구리가 연나라의 속국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52년에 황제임을 자칭한 모용준은 이듬해 업(鄴)으로 천도했다. 업은 하남성의 동북단 안양시 임장(臨漳)현 서남쪽 40리로, 지금의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역으로 산서·산동성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23년(353) 계축 정월, 고국원제는 축하사절을 연나라에 보내 모용준의 즉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대방을 정벌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모용준은 지난해 11월에 칭제를 했으나 지금에서야 대례를 치르고 곧 중원으로 들어갈 거라고 하면서 고구리와의 싸움을 피하고자 내내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면서 말하기를 “동방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니 잘 처리하시오. 짐은 장차 그대를 나의 아들 같이 여길 것이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상에게 자신의 13살 먹은 딸 호인공주를 처로 주었고, 부마도위·현토군왕(駙馬都尉玄菟郡王)으로 봉했다. 상은 서하(西河)로 나가 공주를 맞이해 온탕으로 들어갔으며, 공주에게 딸려온 신하들에게는 용산행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서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887)
 
모용준은 자신의 인척과 신하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봉했다. 그 중 고구리와 관련된 지명은 유주에 속하는 범양, 낙랑, 발해, 대방, 어양, 하간, 태원 등이 있었다. 현토태수 을일을 보내 상을 부마도위·양맥대왕(梁貊大王)으로 바꾸어 봉했다. 참으로 굴욕적이었으나, 태후가 인질로 잡혀있으니 참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모용준은 계(薊)로 천도했고, 모용수는 대(臺)에 있으면서 모용준을 위해 민심을 수습했다. 상 또한 모용수와 을일을 환대했다. 양맥은 양수(梁水)에 사는 맥족(貊族)이라는 뜻이다. (양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2152 참조)
   
▲ 양수는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업은 하남성 안양시 북쪽 임장현     © 편집부
25년(355) 을묘 9월, 고국원제가 동생 민을 연나라에 보내 주태후를 돌려보내달라고 간청하니 모용준이 승낙하고는 전중장군 도감을 시켜 호송케 했다. 태후와 민은 연나라의 명산과 대원(大院)을 두루 돌아보고 12월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모용준은 상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낙랑군공(征東大將軍營州刺史樂浪君公)으로 봉하고 현토대왕은 지난날과 같게 했다. 영주(營州)는 유주(幽州)에서 떨어져 나온 행정구역이다.
 
<대명일통지>의 설명에 따르면, “순임금이 기주의 동북을 나누어 유주와 금주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나라의 유주 땅이다. 진나라 때는 요동군 땅이었으며 또 이 유주는 요서군이 되었다. 한나라 때는 무려와 망평현의 땅이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 당나라에서는 유성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 (大明一統志 : 舜分冀東北爲幽州錦州 其所統也 商爲孤竹國 周幽州地 屬燕 秦爲遼東郡地 又以幽州爲遼西郡 漢爲無慮望平縣地 屬遼東郡 唐置柳城縣屬營州)”라는 기록이 있어 유주와 영주는 거의 같은 곳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영화(永和)라는 연나라 연호를 쓸 것이며 사사로이 왕을 봉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대해 상은 “우리나라 역시 연호가 있는데, 어찌 영화를 쓰겠는가! 종척을 봉왕하는 것은 시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라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응당 그 큰 뜻은 천천히 따를 것이다.”라고 답했다. 굴욕적인 지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젊잖은 표현이었다. 여기서 고구리는 대대로 자체연호를 쓴 황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시는 어쩔 수 없이 연나라의 제후국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국원제 26년(356) 병진 정월, 주태후가 조례를 받았다. 상과 황후가 좌우에 시립했고, 태후가 연나라에서 격은 고역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니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총민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신선도를 좋아했던 주태후는 3년 후 춘추 69세에 죽는다. 태후는 정사에 간여는 했으나 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연나라에 있을 땐 모용황의 비위를 맞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용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해 11월, 단감이 연나라에 항복했고, 연나라는 모용진을 시켜 광고(廣固)를 지켰다. 광고는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360년에 모용준이 42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아들 모용위가 나이 11살에 뒤를 이었다. 어미 가족진이 국정에 간여했으며, 백부 모용각이 태재(太宰)가 되어 섭정을 했는데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2월, 상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새로 즉위한 모용위를 축하했다.
 
그러나 367년에 모용각이 죽자 실권을 잡은 모용평(評)이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부터 전연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369년 11월, 모용평이 모용수의 무공을 두려워해 죽이려 하자, 모용수는 처 단씨와 아들을 데리고 전진의 3번째 왕인 부견에게로 도망쳐 들어갔다. 드디어 연나라 내부에서 왕족끼리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망하려는 징조였다. 12월에는 진나라 부견이 연나라의 낙양을 정벌했다.
 
고국원제 40년(370) 경오 정월, 연나라에서 사신 을육이 와서 우리에게 군사를 내어주길 청했다. 상은 백제에게 치양에서 패한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미안하다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을육의 어미가 본래 고구리 사람이었기에 을육은 고구리를 상국으로 여기고 귀순할 뜻이 있었기에, 연나라가 오래 가지 않을 조짐이 있음을 몰래 알려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서 서쪽의 방비를 새롭게 했다. 고국원제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해 4월,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이 위덕(威德)성을 취했다가 자신의 수하에게 죽었다. 진(秦)의 왕맹이 로원(潞原)에서 모용평을 대파했고, 11월 부견이 연나라 도성 업으로 들어가자 연의 모용위는 고양(高陽)으로 도망가다가 진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모용평이 업에서 고구리로 도망쳐오자 상은 남·민과 람국(藍國)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평곽(요동군)과 안평을 취하라 했으며, 방식·성백·우철에게는 현토와 남소를 빼앗아 지키게 했다. 본격적인 국토수복 즉 다물(多勿=復舊土)을 실행했던 것이다.
 
▲ 남소는 현토군, 로성과 람국(장치)는 산서 동남, 업은 하남 동북단     © 편집부
위에서 언급된 로원은 로(潞) 땅의 들판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로성(潞城) 일대로 추정되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고양군은 영안평(领安平)、요양(饶阳)、업(邺)、고양(高阳)、신성(新城) 등 5개현으로 구성되었으며 고양현을 치소로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신성(곡옥현)으로 미루어 보아 산서성 동남부로 추정된다.
(신성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0275 참조)
 
또한 여기서의 람국(藍國)은 인명일 수도 있고, 고구리의 제후국일 수도 있다. 여하튼 람국에 대해서는 중국통사 참고자료 고대부분(中國通史參考資料古代部分)-4에 “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蓝水,源出於山西屯留县西南,东流入漳。)”라는 문구가 있고, 보다 상세한 자료로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나오는 “강수(絳水)는 산서성 동남부 둔류현을 흐르는 강”이라는 설명이 있어 산서성 장치(長治)시 일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수 : 산서성 둔류현 서남 80리 반수산 남쪽에서 나와 동으로 로성현 경계와 만나는 장촌까지 흘러 장수로 들어간다. <수경주>에서는 진수라 한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라고 있는데 무람수라 하는데 그 물길이 모두 같다. 다른 이름으로 진수라 한다. ‘위서지형지’에는 강수와 람수가 있는데 물길이 같다. 즉 강수가 람수이다.
 
(원문) 绛水 :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八泉涌出如珠,合而东流,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水经注谓之陈水,《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其绛水所行之道,皆今蓝水也,而别有陈水,则今绛水所行之道也,与今府县诸志不合,惟魏书地形志有绛水,又有蓝水,与今水道相同。
 
고국원제가 모용평의 불충했던 죄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그대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찾아 왔는가?”라고 물으니, 모용평은 “나는 대왕과 함께 힘을 합쳐 연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싶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상이 대노하며 “하늘도 그대의 악행에 넌더리가 났는데, 그대는 감히 또다시 큰소리를 칠거요!”라면서 그를 참하라고 명하자, 모용평은 신하가 되어서라도 상을 섬기겠다며 애걸복걸했다. 이때 좌보 인이 나서며 “우리 쪽에서 요동을 취하는 것은 모용평을 죽이지 않고 결박해 진나라로 보내 화친을 맺음만 못합니다.”라고 고했다.
 
결국 모용평은 진의 부견에게로 보내졌다. 이로써 모용외가 중흥시킨 모용선비가 307년 최초로 세운 연나라는 63년만인 370년에 완전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를 이후 세워지는 다른 모용선비의 연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전연(前燕)이라 한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6/07/15 [14:42]  최종편집: ⓒ greatcorea.kr
 

선거 동안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게시물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이 되지 않은 선거관련 지지 혹은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17.04.17~2017-05.08)에만 제공됩니다.
일반 의견은 실명 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