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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대 내치에 힘쓴 성군 고국원제 (6부)
모용황의 죽음으로 모처럼 평화가 찾아온 고구리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7/26 [00:45]
고국원제의 전반기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모용황이 348년에 죽은 이후 고구리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고구리는 고국원제의 모후인 주태후가 인질로 잡혀있어 연나라의 속국 아닌 속국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국원제처럼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임금은 원래 이런 평화기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17년(347) 정미 2월, 고국원제는 신성태수 우성이 죽자 면강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다가, 그해 면강의 패거리인 패자 12명을 모조리 쓸어냈다. 면강은 20년간이나 수군을 주관하면서 조세를 많이 거두어들여 재산을 축적했고 청하의 큰 상인인 환리의 처를 빼앗았으며, 자신의 무리들을 12개 패읍에 널리 심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처를 빼앗는 것을 취미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를 총선장군 마발이 주청하기에 그들을 모조리 쓸어낸 것이다.

11월에 동생 무(武)를 신성태수로 삼고 소수 2명과 장군 3명을 딸려 보내 보좌케 하고는, 면강을 죽이지는 않고 환도대가로 삼았다가 349년 정월에 동해태수로 내보낸다. 수하 12명만 쓸어내고 면강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부정부패가 있기는 했으나 수군의 반발을 우려했고 그간의 공적을 참작해 변방으로 좌천시킨 것으로 보인다.
(신성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0275 참조)
    
▲ 신성은 산서성 남부 임분시 곡옥현에 있는 성으로, 현재 곡옥고성이라는 명칭으로 남아있다     © 편집부


19년(349) 을유 9월, 낙랑 왕 고희가 유색구와 뉴작 등을 이끌고 부헌과 함께 대방을 쳐서 다섯 성을 빼앗았다. 색구를 신지(新地)태수로, 휴절을 점선(黏蝉=盤山) 태수로, 감을 채공사로 삼았으며, 남을 후위장군으로 삼아 대방(帶方)을 지키게 했다. 이듬해 안동(安東)현의 경계에 있는 신지를 평나(平那)로 고쳤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점선과 대방은 낙랑군에 속한 현이고, 안동·신지·평나의 위치는 현재 알 수가 없다.

24년(354) 갑인 4월, 동해태수 면강이 백색 산호와 자색 옥 및 거대한 무명조개를 바쳐왔다. 옥공에게 명하여 보경(寶鏡)을 만들어 해후의 궁에 안치케 했다. 9월, 고국원제는 사위(四衛)군을 환도성에서 사열하고는, 모든 장수들에게 명해 무예재능이 있는 자를 천거하게 했고, 선발된 자들에게는 소당(小幢)의 직분을 주었으며, 좋은 칼을 만드는 장인 12명에게도 상을 내렸다. 소당이란 군대의 편제상 깃발 하나에 해당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25년(355) 을묘 정월, 구부(丘夫) 태자를 정윤(동궁)으로 삼는데, 구부는 나중에 고국원제의 뒤를 이어 등극하는 소수림제이다. 3월, 경총부를 두어 종친들과 외척을 관리하게 했으며, 대약부를 두어 약과 음식 및 수라상의 일을 맡겼으며, 봉신부를 두어 어보와 제사기물을 관리하게 했다. 상의 아우 인을 경총대부로, 송을 대약대부로, 석을 봉신대부로 삼았다.

26년(356) 병진 4월, “신라의 흘해 이사금이 죽고, 내물 이사금이 대를 이었고 미추 이사금의 손녀를 비로 삼았다. 내물 이사금의 모친은 미추 이사금의 딸인 휴례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미추 이사금이 자신의 외사촌과 혼인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내물 이사금의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고, 비는 김씨로 미추왕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친결혼한 사실을 숨겼다.

이 기록 역시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씨였던 미추 이사금 사후 석씨인 유례가 15년, 기림이 13년, 흘해가 47년 도합 75년이 지난 후에 다시 김씨인 내물 이사금이 즉위해 47년간 왕위에 있었으므로, 내물 이사금의 왕비가 최소 75살 때 왕비가 되었다는 건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어불성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미추왕의 딸은 미추왕 생전에 잉태되어야 하므로 그렇다)

이어 <고구리사초략>에는 “신라와 백제에서는 누나나 여동생 또는 딸과 고모나 이모를 처로 삼기도 했으며, 색두와 숙신에서는 어미와 자식이 치붙고, 자몽과 개마 역시 이런 풍조가 많았다. 대략 서쪽이 심하고 동쪽이 심하지 않아서 물이 흐르는 형세였다.”라는 북방기마민족의 혼인풍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내물이사금조에 “아내를 택할 때 자기와 같은 성을 택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확실히 하자는 뜻에서다. (중략) 신라의 경우는 같은 성씨를 취할 뿐 아니라 친사촌이나 고종사촌·이종사촌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법으로 따지면 크게 어긋난 일이다. 저 흉노의 풍속에 어미도 간음하고, 자식도 간음하는 행동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내물왕의 근친결혼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를 도덕적으로 나쁘게 평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는 조선왕조 유학자에 의해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리에서는 통상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리는 지금의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동류하는 큰 강은 두만강 밖에 없지 않은가!

28년(358) 무오 정월, 양주 등 축설군 300인이 큰 고개를 넘어서 장새(獐塞)진을 함락했다. 2월, 대평(大平)왕이 아들 소이를 보내 입조했다. 대평은 최체(最彘) 동남에 있는 번갈족(藩鞨族)인데, 북갈족과 싸워 북쪽의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는 스스로 태평국(太平國)이라 칭했다. 신라 및 백제와는 서로 통교했는데, 신라는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했다. 상이 이를 토벌하고자 방식에게는 2천기를 이끌고 최체에서 출진하게 하고, 람국에게는 3천기를 이끌고 황남(洸南)으로 출진하게 했더니 대평이 두려워하며 소이를 보내 입공한 것이었다.
▲ 산서성 임분시 북쪽 곽현 동북쪽에 있는 고구리의 체성     © 편집부

위에서의 최체는 체현을 말함인데,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북쪽에 있다. (체현: 한나라 때 설치되었고 체수에서 이름을 얻었다. 후한 때 취안현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산서성 곽현 동북쪽에 체성이 있다. 즉 주나라 려왕이 달아난 곳이다. (원문) 彘县: 汉置,因彘水为名,后汉改为就安县,今山西霍县东北有彘城,即周厉王所奔。) 원래 임분시에 있던 신라와 아주 가까웠기에 서로 통교한 것이다.

태평국은 태평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로 보인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검색하면 지금의 산서성 분성현 동북 27리로 나온다. 번역하면 “태평현 : 후위에서 설치한 태평현은 지금의 산서성 분성현 동북 27리에 있다. 북주 때 태평으로 바뀌었고, 수나라 때 지금의 현을 동북 30리로 옮겼고, 당나라는 지금의 동북 27리로 옮겼다. 위나라에서 경덕보로 옮겨 다스렸는데, 지금의 분성현이다. 명·청 모두 산서 평양부에 속했고, 민국 때 분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문) 太平县 : 后魏置泰平县,在今山西汾城县东北二十七里,北周改为太平,隋时移治今县东北三十里,唐移于今治东北二十七里,即魏故治,又移于敬德堡,即今汾城县治,明清皆属山西平阳府,民国改名汾城。         
       
▲ 산서성 임분시 부근 고지도에 나타난 분서, 체현(곽현), 신성(곡옥), 태평(분성)     © 편집부

31년(361) 신유 정월, 우신의 딸을 훗날 고국양제가 되는 이련(伊連)의 처로 삼고 새로운 궁전을 주었다. 이련은 대신들의 처나 딸들과 통정하는 일이 많아서, 상이 경부에게 명해 그를 자제시키라 했으나 경총대부가 유약해 그러지를 못했다. 이때 우신의 딸이 이련의 아들을 가졌음에도 처로 삼아주지 않자, 우신은 딸을 불태워 죽이려고 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맞아들이라 명했던 것이었다. 3월, 고성이 북해(北海)를 정벌해 천리의 영토를 늘리고, 무이(撫夷) 12인을 그 곳에 배치했다.

32년(362) 임술 10월, 창번이 새로운 율령 20조를 상주했다. 연나라의 제도를 많이 참조해 군사제도는 우신이, 경제제도는 우영이, 민사제도는 우담이, 형사제도는 담기가, 제사제도는 창번이 주관했다. 명을 내려 율령소와 율학소 및 제주소를 두게 했다. 3년 후인 365년 4월에 세간에서 시행되었다. 이름 하여 용골령, 선품령, 공형령, 무품령, 향도령, 오호령, 삼호령, 공정령, 군정령, 역도령, 노비령, 전택령, 산장령, 해포령, 수렴령, 장원령, 시원령, 세시령, 산적령, 평대령이 그것들이다.

33년(363) 계해 3월, 도성의 인구가 많아졌기에 여러 관청을 평양으로 옮겼다. 8월, 북해의 수맥(水貊)인 300명이 입조했기에 작위와 옷을 내려주고, 경도의 여인으로 처를 삼아주어 편안히 살게 했다.  9월, 상이 최체에게 순행함을 베풀고는 탕궁(湯宮)을 들렀다가 돌아왔다.

37년(367) 정묘 팔월, 노비8등례를 정했다. 매년 노비를 관리하는 사자가 공을 가늠하게 했다. 1등 된 자는 풀어주어 마음대로 안착할 곳을 정하게 한 연후에, 매년 감당할 공물을 정해주어 공이 있으면 양인(良人)으로 환속시켰다. 산업노비로서 충직·선량하면서 재주 있는 자는 2등이나 3등이고, 평범한 자는 4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6등이다. 전쟁노비로서 충직·선량한 자는 3등이나 4등이고, 평범한 자는 5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6등이다. 범죄노비로서 충직·선량한 자로 연좌된 자는 4등 혹은 5등이고, 평범한 자는 6등이며, 시원찮은 자는 7등, 형을 산 자는 8등이다. 

신원(神院)·궁원(宮苑)·공당(公堂)에서는 2~3등을 쓴다. 황자·황녀의 전택(田宅)에는 3~4등을 쓴다. 공신의 사택에서는 5~6등을 쓴다. 공역에는 7~8등을 쓴다. 스스로 종군하고자 하는 자는 2·3·4등에 한해 군대에 보충·편성한다. 계집종으로서 예쁘고 가무에 능한 자, 상전을 모시거나 심부름에 능숙한 자, 허드렛일을 잘 하거나 부엌일에 능한 자들은 공적으로는 차를 따르며, 대신에 사적으로는 양인집의 종으로 쓴다. 사내종은 병부경에 속하거나 상전을 모시는 자로서 대부경에 속한 자들은 모두 주부가 있어 그를 따른다. 

창번의 노비령은 단지 산업노비·전쟁노비·범죄노비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관노(官奴)는 담당 관리가 그를 살리고 죽이며, 사노(私奴)는 그의 주인이 그를 살리고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비들도 공을 세워 등급이 내려가면 양민으로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천한 이들도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처럼 노예의 전면적인 해방은 아니나, 노비도 공을 많이 세우면 양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제도라 할 수 있다. 가히 고국원제는 성군이로세! 

▲ 최충헌의 사노 만적의 난 같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은 고국원제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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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26 [00: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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