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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백제 근초고왕에게 승승장구한 고국원제 (7부)
고구리 고국원제와 백제군의 전투지는 하남성 동북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8/07 [19:54]
고국원제는 41년간 재위하며 선정을 베풀며 많은 제도를 정비한 성군이었다. 18년(348) 모용황이 갑자기 사냥터에서 죽기 전까지 내내 그의 침공에  시달렸으며, 이후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어머니 주태후 때문에 잠시 모용준의 제후 아닌 제후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연나라가 망하자 고구리는 잠시 평화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제 26년(356) 이후 38년(368)까지 12년간 아무런 기록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의 하반기에는 백제의 대영웅 근초고왕과의 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22년(352) 임자 2월, 고국원제는 해발을 정남대장군으로 삼아 대방을 정벌하고는 그 왕 장보를 사로잡았으며, 백제 근초고왕을 관미령(関彌岺)에서 대파하고 세 개의 성을 쌓았으며 두 나라의 남녀 1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7월에 해발을 진남대장군으로 우신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아 각기 8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고, 용백을 진북대장군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으며 서로들 간에 호응토록 했다.

시조 온조가 고주몽의 곁을 떠나 나라를 세운 이래로 백제는 고구리와 전쟁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백제 고이왕이 신라의 봉산성을 침범하자 신라의 김옥모 태후로부터 원병을 요청받은 중천태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한 적이 있고, 고구리가 대방을 공격하니 대방에서 사위인 백제 책계왕에게 원병을 요청해 백제가 출병한 적은 있으나,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은 이번이 처음인데다가 고구리가 선제공격까지 한 것이다.
 
여하튼 고국원제의 고구리군은 백제 근초고왕과의 첫 번째 관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관미령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자마자 군사를 7군데로 나누어 백제를 공격해 20일 만에 함락시킨 곳인데, 성의 사면이 우뚝하고 해수(海水)에 둘러싸인 즉 난공불락의 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으나 그 위치는 현재까지 미상이다.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임진강 하구에 있는 파주 오두산성을 관미성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식민사학계는 임진강 하구 파주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비장하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을 수군기지로 할 바보는 없지 않은가!                                                                                                                              © 편집부

27년(357) 정사 10월, 해발 장군이 백제의 근초고왕을 쳐서 성 두 개를 취했으며, 포로 200인을 보내왔다. 백제와의 2번째 전투에서도 고국원제의 고구리가 완승을 거둔 것을 알 수 있다. 이듬해 정월, 해발 장군이 들어와서 남쪽을 정벌할 방책을 상주하며, 한산(漢山)과 평나(平那)에 곧바로 닿는 길목인 수곡(水谷)을 취하자고 청했다.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려 설명해보여주니 아주 명쾌한지라, 상은 크게 기뻐하며 해발에게 준마와 보도를 내려주었다.

위에 언급된 한산과 평나의 위치는 현재 알 수 없으며, 수곡의 입구인 수곡구(水谷口)에 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에 “水谷口 : <환우기> 수곡구에서 당현 주가보까지 모두 13소구다(《寰宇记》 自水谷口至唐县周家堡,凡十三关口)”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당현(唐县)은 기주 중산국(冀州中山國)에 속한 지명으로 당나라 요임금의 묘가 있는 망도(望都)현으로 산동성 서단 하택시 견성현(荷澤鄄城)이다. 
 
▲ 산동성 서쪽 끝 하택시 견성현에 있는 고림 요릉이 진짜 요임금의 무덤이고, 이곳이 바로 당현이다.     ©편집부

고국원제 28년(358) 무오 6월, 해극이 수곡성을 쳐서 빼앗고 남녀 200명을 붙잡아서 돌아왔고, 이듬해 10월, 백제가 미녀 5인 및 백마 한 쌍과 맑은 구슬 10과 및 대방에서 도망친 자들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게 된다. 고구리의 계속된 공격에 백제 근초고왕이 일단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34년(364) 갑자 5월, 양주가 나(那)와 파(巴)에 있는 두 갈족(羯族)을 토벌해 그 성을 빼앗고, 백제인 남녀 100인을 잡아다 바쳤다. 그 두 갈족은 백제의 북쪽 변경에 살며 배반하고 뒤집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하기에 토벌해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듬해 정월, 선극이 백제의 이진(伊珍)성을 정벌해 빼앗았다. 나·파와 이진성이 어디인지는 현재 미상이다.

이듬해 8월, 선극이 백제군을 복수달령(福水達岺)에서 추격하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당산대왕(棠山大王)이 길을 막아 나서니, 선극은 “필시 복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물러났다. 적들이 과연 고개를 넘어오는지라 복수천(福水川)에서 맞싸워 크게 이겼다. 2천명을 포로로 잡고, 적장 진벽과 사리를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병장기과 마필 또한 많았다.

당산대왕이란 고구리의 당산에 있었던 소도(蘇塗)에서 모셨던 당산후토신(棠山后土神)을 말하는 것으로, 미천대제 11년 기록에 “사람들은 당산(棠山)의 치사(雉祠)와 평산(平山)의 달사(獺祠)를 마산(馬山)의 우사(牛祠)와 함께 삼소(三蘇)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두주>에 제 당읍대부(《杜注》“齐棠邑大夫)라는 문구가 있어 황하북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부근에 있는 작은 읍으로 보이며, 마산은 산서성 부산현일 가능성이 크다. 

복수는 일명 복록수(福祿水)로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에 속한 탁군(涿郡)의 양향(良鄕)현을 지나는 강이라는 아래 <수경주>의 설명이 있어 대야택(발해)의 서쪽에 있는 하남성 복양시 범현 일대로 보인다. 참고로 탁군은 유비와 장비의 고향이고, 수양제가 고구리를 침공하기 위해 요택 통과용 수로인 영제거를 만드는데 심수의 물을 남으로 끌어들여 황하에 다다르게 해 100만 대군을 집결시킨 북쪽 탁군과 통하게 했다는 곳이다. 

(원문) 《水经注》 “广阳水,出小广阳西山,东流迳广阳县故城北,又东福禄水注焉,乱流东南至阳乡右注圣水。”亦称广阳河,一名义河,源出房山县东北公村,东南流入良乡境,旧入圣水,自卢沟南决,遂东注桑干河,今自良乡南流,与盐沟河全为牤牛河,入于拒马河。

▲ 대야택과 만나는 하남성 동부에 유주 탁군과 기주 중산국이 있다. 강태공의 제나라 도읍은 신향시 위휘현이다.     ©

38년(368) 무진 4월, 고국원제가 순행해 낙랑에 이르러 병부경 방식과 함께 정남대장군의 군사들을 위무하며 “그대들이 오랫동안 국경에 주둔하며 창을 베개 삼아 잠을 잔 것은 필시 공을 세우려는 마음이 있었음이오. 자신이 공을 세운 것 같은데 보답을 받지 못한 자는 나와서 얘기하시오. 자신이 공을 세웠음을 스스로 말하는 자에게는 상을 줄 것이고, 그 장수에게 따져 묻는 것도 생각해보겠소.”라고 말했더니, 모든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황제께서 친히 원정을 함께 하여 상벌을 명백히 가려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고국원제가 양주에게 “그대는 갈(羯)족들의 성을 격파할 당시에 병사들에게 미녀들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싸움에 이기고 나서는 미녀들을 나주어 주지 않았소이다. 그리하여 사졸들이 반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소이까?”라고 물으니, 양주가 아뢰길 “군사들은 용맹함을 숭상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미녀에 미혹되면 군대는 어지러워지게 되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찌 미녀를 주겠다고 약속했겠습니까? 게다가 백제사람들은 지키기도 잘 할 뿐만 아니라 관문의 변방에는 미녀들을 많이 데려다 놓지도 않았는데, 어찌 미녀들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참언(讒言)이 있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설사 참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그 말을 믿겠소. 지난번에는 공을 세웠는데, 이번엔 어찌 멀찌감치 있기만 하고 진격하지는 못하는 게요?”라고 물으니, 양주가 아뢰길 “깊은 산 속이라 호랑이가 많고 기습하기도 불가해, 지난번과는 형세가 다르옵니다. 게다가 이번엔 적진의 중요한 관문이 철옹성인지라 서두르면 패하기도 쉬우니, 오래 끌어서 위세를 소멸시키며 안전을 꾀하는 계책입니다. 한 개라도 골문(骨門)이 열리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파죽지세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상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기고는 무산(撫山)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기록들이다. 아마 고국원제가 백제에게 승리한 사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고의 삭제로 보인다. 그런데 이후 다음해부터는 백제가 승기를 잡고 계속 공격해와 결국은 고국원제가 전사하는 비극을 맞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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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8/07 [19: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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