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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제의 무덤이 있는 탕하는 황하북부 하남성 (9부)
국강상대소열무황제, 신종(新宗), 연수(延壽)라는 연호사용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8/31 [17:09]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고국원제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대행은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공손하고 검약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무예를 닦으면서도 농사를 장려했다.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전쟁터에 나서면 반드시 친히 선두에 섰으니 사졸들의 마음을 흠뻑 얻었다. 안으로는 후와 태자 등을 아낌에 정성이 극진하니 화목함이 항상 충만했다. 음주가 잦지 않았고, 손으로는 노름이나 쓸모없는 것에 손대지 않았다.     

사냥과 유희는 사슴제사나 동굴제사 등의 일이 있을 때에만 했고, 하늘을 우러러 모심에 부지런했다. 정사를 살핌에는 종척과 공경(신하)들과 항상 협의했으며, 때때로 당신의 처자를 찾아 위로하기를 여느 사람 대하듯이 하니 종실의 여인들은 상을 하늘같이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무(仙巫)와 잡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유학하는 인사를 등용했으며, 백성들에게는 책을 읽도록 하여 예의를 알고 천한 것과 거짓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했다.     

황상은 동생들이 많았어도 모두를 현명하게 가르쳤는데, 항상 유총과 석호의 행실을 경계해 골육상쟁을 악행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했으며, 황상의 모든 동생들과 한 자리에 모이는 때에는 여느 집안사람들처럼 나란히 누워 함께 즐겼더니 아끼는 마음이 얼굴마다 흘러넘쳤다. 짐짓 황상의 모든 동생들은 황상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받들었으며, 황상은 동생들이 얻고자 청하는 바가 있으면 거의 모두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고국원제가 그 행실을 경계했던 유총(劉聰)은 5호16국 시대 전조(前趙, 304~329)를 세운 흉노족 유연(劉淵)의 아들이다. 310년 유연이 죽고 이어 왕위에 오른 장남 유화가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 등의 동생들을 제거하려 하자, 유총은 모반을 일으켜 형을 죽이고 전조의  3대 왕이 된다.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키고는 회왕을 사로잡은 이후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환관이 득세했다. 이듬해 회왕을 심하게 모욕하다가 살해했으며,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서진의 말왕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역시 갖은 모욕을 주다가 이듬해 살해했고, 318년에 병사한다.     

석호는 5호16국 시대 후조(後趙, 319~351)를 세운 갈족 석륵의 조카이다.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했던 그는 333년 석륵이 사망하자 태자 석홍을 왕위에 올리고는 섭정왕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궁궐을 수축하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시켰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다. 주변국들에 대한 무리한 원정을 실시해 영토를 늘리기도 했으나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실시해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후조는 석호의 아들들이 벌인 후계자 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잔혹한 숙청이 벌어졌고, 석호는 349년 3대 왕위에 오른 후 3개월 후 사망하고 만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전조(흉노)와 후조(갈족)의 지도     © 편집부

사관의 평은 이어진다. “대행은 늘 3대경을 읽어 정사의 거울로 삼았고, 고국원(故國原)의 산천을 아끼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미리 무덤을 만드는 공역을 함은 백성들에게 큰 폐해가 된다는 이유로 못하게 했기에, 지금 대행의 시신을 빈궁에 안치하고서야 고국원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태후가 옥관과 금곽을 쓰기를 원했고 조왕(국부 해현) 또한 찬동하는지라, 산호와 상아 및 귀한 조가비를 구하고 있었다. 

대행께서는 논밭 사이에 살고 있는 유학들을 조용히 찾아가 종일토록 도(道)에 대해 토론하실 때는 먹는 것조차 잊었고, 말씀하실 때는 가려서 간략하게 하셨고 지극히 당연한 말만 하셨다. 근자에 유생들이 글을 올려 “옥관을 쓰면 대행의 검소한 덕에 누가 될 것이오니 그만 두시라.”고 아뢰었다. 대행께서는 아름다운 덕행으로 집안을 교화하셨기에, 해후와 천강 또한 부지런히 음교를 따라서 아녀자의 덕을 지킬 수 있었고, 대행의 치세 내내 하루도 해이함이 없었다.     

대행이 돌아가시자 태후께서는 처음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나, 세간의 말을 두려워해 늘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지켰고, 대행께서 부지런히 선행하던 나날을 사모하여 다시금 두려운 듯 스스로 지키는 바도 많았다. 이듬해인 임신년 2월 25일에, 고국원(일명 湯河源)에 장사지냈다. 결국 옥관과 금곽이 사용되었다. 춘추 61세였다. 제는 후궁이 700인이었으며 황자는 258명이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사관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국원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성군 중에 성군이었다. 그가 만일 영락대통일을 이룩한 광개토호태왕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를 통치했더라면 고구리는 그야말로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했을 것이며 백성들의 삶의 질도 훨씬 좋아졌고 문화의 창달은 물론 나라도 더욱 부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위 시절 주변국에 전연의 모용황과 백제의 근초고왕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다스리던 나라에 임진왜란(토요토미 히데요시)과 병자호란(청 태종) 같은 국난이 있었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모후가 모용황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는 바람에 잠시나마 그의 제후가 되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으며, 급기야는 백제와의 전투를 직접 선봉에서 지휘하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전사한 불운한 황제였다.     

고국원제는 <수서>에 소열제(昭列帝)로 기록되어 있으며, 훗날 고구리의 후예인 요나라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추존한 고국원제의 시호는 국강상대소열무황제(國岡上大昭列武皇帝)였고, 청나라 강희제가 추존한 묘호는 신종(新宗)이었고, 연수(延壽)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요천제–고리황제품위(遼天祭 高麗皇帝品位)>와 <만주대제–고리대제의예(滿洲大祭 高麗大祭儀禮)>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서는 현재 러시아에 보관되어 있다.

▲ 경주 서봉총(금관총)에서 발견된 은합에 고국원제의 연호인 연수가 새겨져 있었다.     © 편집부

고국원제가 묻힌 탕하원(湯河源)은 어디인가?     

고구리 황제들의 시호는 통상 그들이 묻힌 장지의 지명을 가져다가 부른 경우가 많이 있다. 아마 XX 땅에 묻혀계신 황제라는 의미일 것이다. 4대 민중제는 민중원(閔中原)에, 5대 모본제는 모본원(慕本原)에, 고국천제는 고국천원(故國川原), 산상제는 산상릉(山上陵)에, 동천제는 동천(東川)에, 중천제는 중천원(中川原)에, 서천제는 서천원(西川原)에, 봉상제는 봉상원(熢上原)에, 미천제는 미천원(美川原)에 묻혔다.    

마찬가지로 고국원제는 고국원(故國原)에 묻혔기 때문에 그런 시호로 불렀으며, 아들인 소수림제는 소수림(小獸林)에, 고국양제는 고국양(故國壤)에 묻혔다고 <고구리사초략>과 <삼국사기>에 공히 기록되어 있다. 이후 광개토호태왕부터는 장지의 이름에서 시호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국원제가 묻힌 고국원이라는 지명이 일명 탕하원(湯河原)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 탕하는 어디일까? 탕하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탕하의 동쪽과 서쪽으로 읽히는 탕동(湯東)과 탕서(湯西)라는 지명은 다음과 같이 추모대제 때 몇 개 나온다. 이후 지명이 다르게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 “추모대제 2년(B.C 36) 을유 8월, 오이 등을 시켜서 하북의 갈(鞨)족을 평정하고, 그 땅을 탕서(湯西)와 질산(質山)의 두 개의 군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추모대제 4년(B.C 34) 정해 정월, 탕동에 있는 갈(鞨)족의 10개 부락을 정벌해 물줄기 밖으로 몰아냈다.”라는 기록의 갈족은 후에 5호16국 시대의 후조를 세우는 석륵의 조상들로 그들이 살았던 땅이 바로 탕하 부근이었던 것이다. 

탕하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아래와 같이 4군데가 나타난다.
汤河(탕하): ①在河北省临榆县西四十里,源出汤泉山,南流迳海阳店,又南经秦皇岛入海,河东岸有汤河镇,旧时京奉铁路经此以达山海关,又有开平矿务局铁路一支,由此东南达秦皇岛,凡冬季北客附轮南下者,均取道于此,今京奉线改路线作弯形经秦皇岛以达山海关,而汤河之站废。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는 탕하에 대한 설명)

② 即辽宁省之哈勒珲穆克河。(요녕성의 합륵혼목극하)

③ 在辽宁省辽阳县东南五十二里,源分水岭,北流入太子河,《清一统志》汉志居就县室伪山。北流至襄平入梁水,分水岭,疑即室伪山,汤河,疑即室伪水也。
(요녕성 요양현 동남 52리, 북류해 태자하로 들어가는 강이다. <청일통지>에 “<한지>에 ‘거취현 실위산에서 양평까지 북류해 양수로 들어간다. 물이 갈라지는 봉우리가 실위산으로 탕하는 의심할 바 없는 실위수이다.”) --> 역사왜곡용 지명이동

④ 源出河南汤阴县西,东流合万金渠旧洹河,至内黄县西南入卫河,本名荡水,唐贞观时,以水微温改名汤水。(근원은 하남성 탕음현 서쪽에서 나와 동류해 만금거(구 원하)와 합쳐져 내황현 서남까지 흘러 위하로 들어간다. 본명은 탕수이다. 당 태종 때 탕수로 미온 개명했다.)
 
▲ 탕하는 황하북부 하남성 학벽시 북쪽 탕음현을 흘러 위하로 들어가는 강. 학벽시는 대조영의 시국처 동모산이 있던 곳이며,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대군을 전멸시킨 천문령은 지금의 운태산으로 낙양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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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의 탕하는 바로 ④번째 “원래 하남성 탕음현 서쪽에서 나와 동류해 위하로 들어가는 강”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근에 바로 고구리 패망 후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후고구리)의 시국처인 동모산(하남성 학벽시 산성구)이 있었고, 또한 이 부근 어딘가에 불운한 성군이었던 고국원제의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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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8/31 [17:09]  최종편집: ⓒ greatcorea.kr
 
그 지역을 찾아보니 Truman 16/09/30 [23:23] 수정 삭제
  바로 얼마 전 그 인근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견되었답니다. 고분은 2009년 공식적으로 발굴되었지만 그 2007년에 도굴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분은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어서 분명 제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게 누구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국에서는 조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하는데 근거가 불충분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군요. 고분 안에는 60세 전후로 추정되는 남자 시신 1구와 50세 가량의 여성, 그리고 25세 정도의 여성도 합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웬지 바로 이곳이 고국원제의 무덤이 아닐까 싶군요...
아마도 Truman 16/09/30 [23:27] 수정 삭제
  고분을 열면 고구려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 뻔하니까 미리 도굴을 해서 내용물을 빼돌린 후에 형식적인 발굴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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