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신라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백제는 온조계와 비류계의 연합국가인가? (1부)
<고구리사초략>으로 비류계와 온조계의 암투 낭설로 밝혀져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9/15 [08:07]

고구리의 성군 고국원제가 춘추 61세에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해가 서기 371년으로 그의 통치 41년째였고, 백제 근초고왕 26년이었다. 백제의 정복군주이며 대영웅인 근초고왕은 당시 고구리가 차지하고 있던 백제의 시국처인 요서와 진평을 수복했으며, 더 나아가 왜(倭)까지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일본의 국보인 칠지도로 증명되었다.
(백제 시국처 참조)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1655
(요서와 진평 참조)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1941

  

▲ 원래 백제 시국처인 요서와 진평은 산서성 남부     © 편집부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베스트셀러 책을 낸 김성호 선생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고구리로 와서 태자가 되자, 소서노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는 함께 주몽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간다. 형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 잡고 동생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는데, 비류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짜 살기 어려웠는데 비해 위례성 백성들의 안락함을 본 비류가 미추홀로 간 것을 후회하며 자살하자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 모두가 온조의 위례성으로 돌아왔다고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성호씨는 비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에서 웅진으로 가서 별개의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고대 삼국(고구려·백제·신라)과 구별되어야 할 또 하나의 제4국가로 백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는 주장이다. 비류는 기원전 18년 대방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다가 낙랑의 압력으로 미추홀로 남하했는데, 이때 온조가 위례성으로 떨어져나갔다는 것이다. 그 후 서기 18년에 이르러 비류는 미추홀에서 웅진으로 옮겨 오랫동안 도읍을 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광개토호태왕 6년 비문에 기록된 백잔국(百殘國)을 온조백제로 리잔국(利殘國)을 비류백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이기 때문에, 리잔과 백잔에 잔(殘)이라는 돌림자를 사용해 형제국가임을 나타냈다고 한다. 396년에 비류백제(利殘國)는 광개토태왕이 이끄는 고구리 수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비류백제의 외척이던 진씨(眞氏)가 자취를 감춰 왜로 들어가 나중에 응신왕이 된다는 설이다.

즉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비류백제는 광개토태왕에게 토멸된 396년까지 무려 413년간을 존속한 고대왕국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비류백제의 역사가 없어진 이유는 비류백제가 망하고 80년 후 온조백제도 고구리 장수태왕의 침공을 받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비류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웅진을 처음부터 온조백제의 영토였던 것으로 역사를 바꾸어 기록함으로써 비류온조의 역사가 말살되었다는 것이 김성호씨의 주장이다. 

▲ 1980년대 초 센세이션을 일으켜 베스트셀러였던 김성호씨의 책     © 편집부

  
이에 반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을 저술한 홍원탁씨는 백제에서 비류계와 온조계가 왕위 주도권 다툼을 하던 중 온조계인 근초고왕이 정변을 일으켜 비류계인 계왕을 시해했을 때 계왕의 후손들과 신하들이 370년경을 전후로 웅진지역과 일본열도로 진출해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 왜(大和倭)의 기원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비류백제는 일본으로 간 백제의 통칭이며 소위 일본에서 불리는 백제의 명칭 구다라(久多良)의 시원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백제에서 비류계 왕을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대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22대 문주왕 이후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이번 연재에서는 8대 고이왕 ~ 12대 계왕까지 4명의 왕이 과연 비류계였는지 여부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왕통은 ①온조(46년 재위) --> ②다루(50년) --> ③기루(52년) --> ④개루(39년) --> ⑤초고(49년) --> ⑥구수(21년)까지는 태자에게 순조롭게 계승되었으나, 구수왕이 죽어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할 수 없었기에 ⑦대 왕으로 개루왕의 둘째아들인 고이가 즉위하게 된다. 고이가 선왕인 구수왕의 숙부였기에 이를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인 것으로 인식해, 아마 고이를 비류계로 보고 온조계와의 왕권투쟁에서 이겨 왕이 된 것으로 해석했다.     

이어 ⑦고이(53년) --> ⑧책계(13년) --> ⑨분서(7년)로 이어졌다가, 304년 분서왕이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갑자기 죽었는데, 아들 계(契)가 어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⑩대 비류왕이 즉위했다. 41년간 재위했던 비류왕이 죽은 후에야 분서왕의 아들인 ⑪계왕이 즉위했으나 3년 만에 죽는다. 이어 비류왕의 둘째아들인 ⑫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비류계인 ⑦고이왕과 ⑧책계왕과 ⑨분서왕으로 73년간 넘어갔던 왕권이 온조계인 ⑩비류왕에게 41년간 넘어갔다가 다시 비류계인 ⑪계왕에게 잠시 넘어갔다가 이를 다시 온조계인 ⑫근초고왕이 정변을 일으켜 계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되찾았다는 논리이다. 한마디로 온조계와 비류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왕권을 근초고왕이 깨끗이 정리했다는 말인 것이다.     
   

▲ (좌) <삼국사기> 내용대로 정리해 일부 학자들이 고이왕 후손들을 비류계로 분류한 백제왕계도 (우) <고구리사초략>의 내용대로 정리한 백제초기 왕계도에는 고이왕이 근초고왕의 조부이다     © 편집부

 
<고구리사초략>에는 “보과가 자신의 정부인 비류(比流)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고이(古尒)왕의 서자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책계왕비 보과는 분서왕의 모친으로 대방 출신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분서왕이 죽자 아들들이 모두 어려 대를 잇지 못하고 구수(仇首)왕의 둘째아들 비류가 나라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에서 6대 구수왕이 죽자 7대 고이왕이 53년간 재위했고, 8대 책계왕과 9대 분서왕이 도합 20년을 재위했다. 구수왕 사후 73년 후에 구수왕의 둘째아들 비류가 즉위해 41년간 재위했다는 의미는 비류왕이 최소 73살에 보위에 올라 114살까지 살았다는 것인바 이는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류왕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처럼 고이왕의 둘째아들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며, 서자였던 비류왕이 형수인 책계왕비 보과의 정부였기에 그녀의 도움으로 왕이 되는 기록도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홍원탁씨의 분류처럼 만약 고이왕이 비류계 왕권의 시작이었다면 그 아들인 비류왕과 손자인 근초고왕과 이후 왕들도 모두 비류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에 명백한 오류가 있었음에도 그대로 해석하다보니 백제의 왕들 중 어떤 왕은 온조계이고 어떤 왕은 비류계라는 이상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성호씨와 홍원탁씨의 가설은 높이 평가하나 혹 객관적 자료에 오류가 없는지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백제 왕들의 즉위기록이다.
(고이왕 즉위) 동천태왕 8년(234년) 백제 주 구수가 재위 21년에 죽고, 그의 아들 사반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더니, 초고의 동생 고이가 사반을 폐위하고 자신이 보위에 섰다.

(책계왕 즉위) 서천대제 17년(286) 병오 11월, 백제에서는 고이가 죽었다. 그의 아들 책계가 섰는데,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았으며 의지와 기개가 크게 뛰어났다. 위례성・아단성・사천성을 수리해 우리에 대비했다. 책계는 처가 대방왕의 딸이어서 대방을 편들고 우리에게 덤볐던 것이다.

(분서왕 즉위) 고구리사초략에 봉상왕 때 기록은 유실되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분서왕의 출신지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4812 참조)    

(비류왕 즉위) 미천대제 5년(304) 갑자 10월, 계림사람으로 예쁘게 생기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낙랑 왕 자술의 신하 황창랑이 미녀처럼 꾸미고 분서를 찾아갔더니, 분서가 그 미모에 빠져 수레 안으로 불러들였고 황창랑이 분서를 칼로 죽였다. 보과가 자신의 정부(情夫)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고이의 서자였는데, 고이시절에 민간으로 피하여 숨어들어가 민심을 숙지했을 뿐만 아니라 힘도 있고 잘 쏘기도 하였다.

(계왕 즉위) 고국원제 14년(344) 갑진 10월, 백제의 비류가 재위 41년 만에 죽고, 분서왕(비류의 재종)의 장자 계가 섰는데, 드높은 기품에 강직하며 용감했고 기사(騎射)에도 뛰어났다.

(근초고왕 즉위) 고국원제 16년(346) 병오 9월, 백제의 계가 죽어 비류의 둘째아들 근초고가 뒤를 이었는데,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식견도 있었다.
    

(다음 연재는 백제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6/09/15 [08:07]  최종편집: ⓒ greatcorea.kr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