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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의 근거인 신공왕후 삼한정벌은 허구 (3부)
일본서기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은 근거 없는 위사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10/20 [21:53]

 

소위 정한론(征韓論)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의 모태는 왜의 신공왕후가 신라왕 波沙寐錦(파사매금)를 정벌한 후 고구려왕과 백제왕에게도 복속의 맹세를 받았다는 아래 <일본서기 신공기>의 섭정전조 기록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재위기간은 80~112년이고 파사라는 글자도 약간 다르다. 그러나 신라왕의 명칭을 매금(寐錦)으로 표기한 것은 광개토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과 같다.

 

<일본서기 신공기>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은 (중략) 가져간 금과 은과 채색 능라견 등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했는데, 이것이 신라왕이 항상 조공을 80척 배로 일본국에 바치는 연유가 되었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바치며 일본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그 군세를 엿보았으나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찾아와 머리를 땅에 대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서번(西蕃 서쪽제후)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소위 삼한이고,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원문)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是以 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 貢于日本國 其是之綠也 於是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國 密令何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以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故因以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

 

▲ 신라왕이 지도와 호적을 바치며 신공왕후에게 항복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린 그림             © 편집부

 

게다가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529월 기록에 있는 칠지도 문구를 근거로 현재 나라현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에 새겨진 X 四年을 동진의 태화(太和) 4(369)로 보고 명문을 임의대로 해석했다. 이는 신공왕후가 신라 파사이사금(재위 80~112) 때부터 백제 근초고왕 때인 369년까지 약 250년 이상을 살았다는 것인바, 그야말로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어불성설의 이론인 것이다.

(기록의 상세한 내용은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6487참조)

 

또한 일본사학자들은 <삼국지 위지 왜전>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다수의 구리거울과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칭호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야마타이국(邪馬台)의 여왕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를 신공왕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록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나라 역시 본래는 남자가 왕이 되어 70~80년을 지냈는데, 왜국이 혼란해져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며 여러 해를 보내더니 모두 한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로 귀신의 술책을 부려 능히 민중을 미혹시켰다. 나이가 들어 장성한 뒤에도 남편 없이 남동생의 보좌로 나라를 다스렸다.

 

경초 2(239) 6월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천자를 예방하고는 조공을 바치기를 바란다고 했다. 태수 유하가 관리로 하여금 인솔해 경도에 이르렀다. 그해 12월에 왜 여왕에게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중략)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삼으며 금인과 자수를 빌려 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정시 8(247) 왜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의 남자 왕인 비미궁호와 평소 화목하지 못했는데, 왜의 재사와 오월 등을 들어오게 하여 서로를 공격한 상황을 설명하라 했다. 비미호가 죽어 크게 묘지를 만들었는데, 지름이 1백여 보이며 순장한 노비가 1백여 명이었다. 이어 남자 왕을 세우자 국중(國中)이 불복해 누차에 걸쳐 주살하니,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다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열세 살 일여(壹與)를 왕으로 세우니 마침내 나라 안이 안정되었다.”

 

비미호는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이사금 20(173)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아달라왕 4(157) 신라의 동해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이 일왕이 되고 나중에 간 세오녀가 왕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성호 선생과 문정창 선생은 세오녀 = 비미호 = 신공왕후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이름에 다 까마귀 오()자가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라고 했다. 과연 이러한 비미호가 신공왕후일까? 

 

▲ 경북 포항시 호미곶에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상     © 편집부

 

일본에서 에도시대까지는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전><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왜 여왕 비미호를 신공왕후로 보아 그녀의 아들 응신(應神 오진)이 세웠다는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아마 일본의 고대국가 연대기를 최대한 앞당기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왕후 55년 기록에 백제 초고(肖古)왕이 죽고 백제 왕자 구수(貴須)가 왕으로 섰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 해는 214년이다. 게다가 64년 기록에 백제국 구수왕이 죽고, 침류(枕流)왕이 섰다.”고 하는데, 구수왕이 죽은 해는 234년이고, 침류왕이 즉위한 해는 384년이다

 

이어 65년 기록에 백제 침류왕이 죽고, 왕자 아화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으로 섰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 해는 392년이다. 침류왕과 진사왕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위 기록의 초고왕과 구수왕은 근초고왕(346~375)과 근구수왕(375~384)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만일 <삼국지 위지 왜전>의 기록이 맞다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과 침류왕 모두는 신공왕후와 아무런 관계없는 가공의 인물이 되고 말 것이며, 게다가 일왕실계보도에 신공왕후의 아들이라고 하는 15대 일왕 응신 역시 이상한 출자(出自)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야마타이국(邪馬台)의 여왕 비미호와 신공왕후는 별개의 인물임이 분명하고, 신공왕후는 분명 근초고왕과 근구수왕과 침류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임이 확실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 15대 일왕 응신(재위 390~399)과 손자 인덕(재위 400~487)의 초기 재위년도가 고구리 광개토호태왕의 통치시기(392~413)와 겹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영락 14(404) 갑진년에 왜가 대방의 경계에 침입해와 (중략)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니 왜구가 무너져 패했는데 목 베고 죽인 적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고구리사초략> 영락대제기에 “14년 갑진 5,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하게 했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은 해적의 무리들이라 인덕(仁德)이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 사죄했고, 상은 서구를 왜로 보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했다.”라는 기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공왕후의 삼한정벌 기록은 아무 근거도 없는 위사(僞史)인 것이다. 신공왕후는 백제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영웅 근초고왕 시기의 인물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런 신공왕후가 고구리·백제·신라 즉 삼한을 정벌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한마디로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삼한정벌 기록은 허구 그 자체인 것이다. 당시 고대국가체제조차 없었던 왜가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삼한을 정벌했다는 기록은 그야말로 조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이상한 <일본서기 신공기>의 기록과 변조한 광개토호태왕 비문을 근거로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정한론으로까지 발전시켜 삼한(조선)을 침략하는 대의명분으로 삼아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행위는 그야말로 가증스러운 기만 그 자체라 할 것이다 

 

▲ 일본 화폐에 사용되었던 신공왕후 초상     © 편집부

  

29대 일왕 흠명(欽明 539-572) 기록에 "임나의 왜가 백제 초고왕(肖古王)과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의 초고왕과 구수왕 역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공왕후 시기에 아마 왜가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에게 정벌을 당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공왕후의 아들인 15대 일왕 응신이 백제인이라는 자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공왕후가 당시 백제왕에게 치욕을 당했던가, 아니면 신공왕후와 응신은 아무 혈연관련도 없었는데 왕권의 정통성 때문에 임의로 응신을 그녀의 아들로 기록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일본의 사가들은 이러한 역사의 쓰라림을 분풀이하기 위해 가공의 역사를 임의로 250년 이상 앞선 비미호 여왕의 기록에다 고의로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 분풀이는 고구리를 정벌하려 왔다가 안시성에서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는 후퇴하다 요택에서 항복하고 돌아간 당태종 이세민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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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20 [21:5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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