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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기자조선, 과연 존재했을까? (2부)
36대~41대 6명 번조선 왕이 천년 41왕을 둔갑한 기자조선
 
편집부 기사입력  2016/11/21 [12:42]

 (1) 기자와 천년 기자조선이란? 


  기자(箕子)의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고도 하며, 은나라 말기 3현 중 한 사람이었다. 기자는 조카인 은나라 주왕에게 간언하다 옥에 갇히고,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를 석방하고는 불러다가 하늘의 도에 대해 물었다.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설명하자 이에 감동한 주 무왕이 기자를 신하로 삼으려 했으나, 기자는 은나라 왕족인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는 조선으로 망명하고 만다. 그러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다.


  기자는 5천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어 평양에 도읍하고는,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8조금법과 정전제를 실시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기자 이후 그 후손들은 900년이 넘도록 조선을 통치했으며 마지막 기준(箕準) 왕이 위만에게 패해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전부이다.

 

▲ 사서 속에 그려진 기자의 화상     © 편집부


(2) 기자조선의 허구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년 기자조선은 완전 허구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자는 천년 넘게 지속된 조선을 뒤엎고 나라를 세울만한 힘을 가진 장수 또는 정치가가 아니라, 단지 현명한 사상가며 학자일 뿐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도
조선에서는 기자를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취급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조선은 나라를 잃지 않고 22분 단군에 의해 900년 가까이 더 통치된다.


  둘째 천년 기자조선이 생긴 이유는 <사기>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의 왕에 봉한 것이 아니라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조선현의 현령에 봉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 무왕이 이웃에 있는 연방대제국 조선의 왕으로 기자를 봉할 수도 없거니와, 만일 조선의 왕에 봉했다면 이는 <사기 송미자세가>에 기록될 작은 일이 아니라 <사기 주본기>에 기록될만한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또한 기자는 조선현의 현령에 봉한다는 교지를 받고는 이를 거부하고 조선이란 나라로 망명했기 때문에 ‘신하가 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남은 것이다. 참고로 조선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라는 국명도 지명에서 유래된 것을 중국이 악용하여 동북공정을 획책하고 있다.


  셋째 기자가 주 무왕에게 설명한 <홍범구주>는 바로 조선의 2대 부루 단군이 태자 때 순임금의 신하 우사공에게 전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이다. 이 정도로 앞선 학문과 기술을 가진 조선의 황제를 어찌 일개 주나라 무왕이 함부로 봉할 수 있으리오!


또한 맹자는 주나라 전성기 때의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 나머지 땅은 모두 단군이 통치하던 조선의 영토라는 말인 것이다. 키 작은 어린애가 거인국의 임금을 봉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중에서도 어불성설인 것이다. 

 

▲ 조선왕조 때 대동강 평양에 조성된 가짜 기자묘     © 편집부

 

(3) 마지막 왕 기준은 기자의 후예


  기자조선이 기자로부터 천년 가까이 지속되었다는 근거가 바로 위만에게 패해 나라를 잃은 마지막 왕 기준이 기자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 천년 기자조선이 허구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사연을 소개하기로 한다.

 

참고로 당시 북부여는 진조선(진한)과 막조선(마한)과 번조선(번한)으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는데, 그 번조선 땅을 통치하고 있던 제후 기준 왕이 위만에게 패한 것일 뿐이다. 즉 조선(북부여) 전체가 망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인 번조선 만이 위만에게 넘어간 것이다.

 

  기자의 36세 먼 후손되는 기후(箕詡)라는 자가 수유 땅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번조선을 다스리던 제후는 수한이었다. 연나라가 번조선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기후가 오천의 병사를 데리고 가서 수한을 도와 전투를 벌여 연나라를 격퇴했다.

 

46세 보을 단군 19년 무술년(B.C 323)에 수한이 후사 없이 죽자 기후가 군령을 대행하다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쳐들어오려고 하니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상국인 조선의 보을 단군에게 사후 윤허를 받게 된다. 기후가 정식으로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면이다. <위략>에도 위 내용과 비슷한 기록이 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하고, 기욱이 죽자 B.C 230년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하고, 기석이 죽자 B.C 191년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하고, 기윤이 죽자 B.C 172년 아들 기비(箕丕)가 즉위한다. 기비는 해모수를 도와 북부여가 대부여를 접수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기비가 죽자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다가 위만에게 패해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이 기자의 먼 후손 중 6대가 번조선에서 왕을 한 것이 전부인데, 이를 조선왕조 유학자들이 41대 927년의 기자조선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즉 1세 기자로부터 35세까지는 실제로 왕을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추존된 왕들인 것이다.

 

번조선의 왕에서 쫓겨난 기준이 한(韓)의 땅으로 가서 한(韓)을 세우고는 자신의 성을 한씨(韓氏)로 바꾸고, 시조 기자를 문성대왕(文成大王)으로 추존하고 이후 35세까지의 기씨 조상 모두를 왕으로 추존하게 된다. 그래서 기준은 청주 한씨의 중시조가 되고, 기자가 한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청주 한씨의 족보에서 명확히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 조상인 기자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는 청주 한씨 후예들     ©편집부

 

(4) 허구의 기자조선 41세 927년


(추존 왕) 태조 문성대왕 재위 44년간,  2세 장혜왕 25년,  3세 경효왕 27년,
 4세 공정왕 30년,  5세 문무왕 28년,  6세 태원왕  5년,  7세 경창왕 10년,
 8세 흥평왕 25년,  9세 철위왕 18년, 10세 선혜왕 29년, 11세 의양왕 53년,
12세 문혜왕 50년, 13세 성덕왕 15년, 14세 도회왕  2년, 15세 문열왕 15년,
16세 창국왕 13년, 17세 무성왕 26년, 18세 정경왕 19년, 19세 낙성왕 28년,
20세 효종왕 17년, 21세 천노왕 24년, 22세 수도왕 19년, 23세 휘양왕 21년,
24세 봉일왕 16년, 25세 덕창왕 18년, 26세 수성왕 41년, 27세 영걸왕 16년,
28세 일민왕 17년, 29세 제세왕 18년, 30세 정국왕 33년, 31세 도국왕 19년,
32세 혁성왕 28년, 33세 화라왕 16년, 34세 예문왕  8년, 35세 경순왕 19년,
(번조선 왕) 36세 가덕왕 후(詡) 27년간 재위, 37세 삼노왕 욱(煜) 25년간 재위,
38세 현문왕 석(釋) 39년간 재위, 39세 장평왕 윤(潤) 19년간 재위,
40세 종통왕 비(丕) 12년간 재위, 41세 애왕 준(準) 26년간 재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이라는 정변을 일으켜 결국 나라를 세우자 명나라 주원장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한다. 그런데 주원장이 하사한 조선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을 본받으라는 의미이고, 앞으로 조선은 기자의 후예가 되라는 뜻이었다.

 

또한 유학을 국본으로 삼은 조선유학자들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공자의 나라를 흠모하게 되어 중화사대모화주의가 이 땅에 깊숙하게 뿌리박히게 되는 것이다. 태종 때 권근이 쓴 〈동국사략〉부터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체계가 확립되었고,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에 의해 집대성된다. 최근에는 기자조선의 허구를 인정하는 경향이 짙다. 

 

▲ 한반도를 천년간 지배했다는 기자조선     © 편집부

 

(5) 후삼한의 성립


  기준이 자신의 추종세력을 데리고 마한을 공격하여 파하고는 한(韓)을 세우는데, 이 한이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고 그 중 마한(馬韓)은 나중에 백제로 발전하고, 진한(辰韓)은 나중에 신라가 되며, 변한(弁韓)은 나중에 가야가 되는 것이다. 이를 조선의 삼한과 구분하기 위해 후삼한이라 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을 세운 기준의 본거지는 상당(上黨)이라는 곳으로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장치시 일대이다. 계유정란을 일으켜 세조를 보위에 올린 칠삭동이 한명회의 호가 상당인 이유는 상당이 한씨를 상징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도 청주시에 상당구가 있는데, 이는 기준의 후손 중 누군가가 그곳으로 들어와 살던 곳이지 원래 한씨의 본향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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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1 [12:42]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일명 기자조선이 과연 허구일까? 아리랑 16/11/22 [21:45] 수정 삭제
  기자는 주왕과 같이 子氏姓이고, 알의 신화 자손으로 동의족입니다. 또한 기자 자손의 성씨는 鮮于,韓, 奇 등이 있고, 이 성씨들은 최소 춘추전국시대 부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자는 조선으로 이동을 했고, 단군은 현명한 기자에게 자리를 이양 하고 장당경으로 옮겼을 겁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으로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라는 기록은 모순적인 기록입니다. 봉할수 없기때문에 신하가 아니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 같고, 단지 기록만 했을 뿐입니다. 또한 무왕이 기자를 직접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보면, 상하관계를 옆 볼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조선은 주나라와 멀지 않은 곳이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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