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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망명객 위만은 정권탈취범 (3부)
북부여의 제후 기씨 번조선을 무너뜨린 위만은 조선이 아니다.
 
편집부 기사입력  2016/12/27 [20:43]

한 고조 유방이 죽자 태자 유영(효혜왕)이 즉위했으나 정치적 실권은 어머니 여태후가 쥐고 있었다. 여태후가 유방의 가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자,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창업공신이었던 연왕 노관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흉노로 망명하고 만다. 그의 부장이었던 위만 역시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고는 번조선으로 망명하여 국경인 상하 운장을 지키는 중책을 맡게 된다.

 

<북부여기> 시조 해모수 단군 45년 기사에 "병오년(BC195)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 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해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했다”라는 문구가 이를 말함이다.

 

부하들이 많아져 세력이 커지자 위만은 기준 왕에게 한나라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나누어 쳐들어오니 들어가서 호위하겠다.”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기준 왕이 이를 수락하자, 위만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기준 왕을 공격하는 정변(쿠데타)을 일으킨다. 방심하고 있던 기준 왕은 위만에게 패해 도망가고 만다.

 

<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 원년 기사에 "정미(BC194) 번조선 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인 위만에게 패망한 뒤 海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의 일부인 번조선의 기준 왕이 도적 위만에게 패해 정권을 빼앗겼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역사적 내용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위만이 공격하여 정권을 빼앗자 (기준은) 장수들과 그 좌우 궁인들과 海(해)로 가서 한의 땅(韓地)에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稱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처음에 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은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海로 가서 마한을 공격해 깨고 자립해 한왕이 되었고 준 이후에 멸망해 마한인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는 기록이 있다.

  

▲ 교과서에 수록된 삼한은 한반도 남부     © 편집부

요약 설명하자면 연나라에서 번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준 왕의 정권을 탈취하자, 위만에게 패한 기준은 추종자들과 함께 해(海)로 들어가 한(韓)의 땅으로 가서 韓(한)을 세우고 스스로 韓王(한왕)이 된다. 이 기준이 세운 한이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고 마한, 진한, 변한으로 발전허게 되는 것이다.

이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이 백제로 발전하고, 진한(辰韓)이 신라로 발전하고, 변한(弁韓)이 가야로 발전한다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논리다. 그러나 위 기록의 ‘走入海’와 ‘入于海’라는 문구로 보아, 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라는 지역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해주(海州), 해성(海城) 등과 같은 곳이다. 황해 바다로 들어가면 익사(溺死) 밖에 더 하겠는가!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도망간 곳이 바로 상당(上黨)으로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장치시의 장자현 일대다. 조선왕조 때 청주 한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한명회(韓明澮)의 군호가 상당군이었고, 현재 청주시에는 대한민국 청주 한씨의 본향인 상당구라는 지명도 있다. 물론 그곳은 한씨로 성을 바꾼 기준이 자리 잡았던 산서성 상당에서 가져다 심은 지명이다. 
 
▲ 위만에게 패한 기준이 도망간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바로 산서성 동남부 상당군 일대이다.     ©편집부
 

 북부여를 적대시한 위만과 우거

 

무력으로 번조선의 정권을 빼앗은 위만은 왕이 되어 상국인 북부여를 거부하고 적대관계가 되어 독자적인 정권체제를 유지한다<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조에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위만의 도적떼에 대비케 하였다. 이에 위만도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3세 고해사 단군조에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녀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위만을 도적으로 규정했다.

 

위만은 연나라 출신이다 보니 오히려 같은 종족인 한나라와 가깝게 지낸다. 위만이 한나라와 북부여 사이에 위치한 관계로 한나라 변방이 북부여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자, 위만은 그 대가로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한나라로부터 많이 얻게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중략)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과 제 땅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략) 요동태수는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위만은) 국경 밖 만이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만이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니 천자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고 기록했듯이 위만은 친조선(북부여)이라기보다는 친중국(한나라) 독자정권이었던 것이다.   

 

또한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사방 수 천리 영토를 가졌다고 한다. 따라서 정권을 강탈한 도적 위만을 위만조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우리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조부 위만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우거는 북부여와의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계속 공방전을 벌인다.

 

▲ 교과서에 수록된 잘못된 한국사 체계를 바꿔야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     © 편집부

 

B.C 118년 북부여를 침공해 크게 이기고 해성 이북 50 리 땅을 차지하자, 이듬해 북부여가 반격한다. 그러나 세 달이 걸리도록 이기지 못하다가 3년 후에야 북부여가 해성을 수복할 정도로 우거는 막강했었다. 그러던 중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쳐들어오고 우거는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신하들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와 같이 위만과 그 손자 우거는 번조선의 정권을 강탈한 도적으로 우리의 북부여와는 적대관계를 지속하며 계속 전쟁을 한 이적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위만조선으로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학교에서 잘못된 역사를 배워 그런지,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천년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위만조선이 B.C 108년 한나라 무제에게 망해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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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2/27 [20:4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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