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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문 결자복원과 새로운 해석 (1부)
호태왕비문의 내용이 다 들어있는 <고구리사초략>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 기사입력  2017/01/30 [13:42]

 

아래 발제문은 2016년 12월 12일(월) 오후에 개최된 제8회 한국·몽골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박정학 (사)한배달 회장이 '호태왕비문 결자복원과 새로운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역사, 특히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면 자료 부족이라는 문제를 실감할 때가 많다. 중국의 자료는 상당히 많지만 일반 연구자들에게는 서글(한문) 사료라는 것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가 어려운 점이 있고, 우리의 시각이 아닌 그들의 관점으로 쓰인 기록이므로 또 한 번의 재해석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광개토호태왕 비문은 삼국사(소위 삼국사기, 1145 출판)보다 731년 앞선 기록이고 삼국사의 원본이 없어진 데 비해 260여자의 결자가 있으나 대부분 원형이 보존된 비문이라는 점, 당시의 고구리인이 쓴 고구리 역사이므로 중국의 기록과 다른 주체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식 서글이 아니라 우리나라식 서글(김덕중은 이를 詞文이라 했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주체적 가치는 실로 엄청나게 높다.

 

그런데 이 비가 재발견된 1880년경으로부터 136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의 주인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중요한 사료에 대한 충분한 연구 논문의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아직 비의 이름도 능비, 훈적비, 석비 등 다양하고, 태왕의 칭호도 대왕 태왕 왕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으며,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비문을 변조했다는 이진희, 문정창, 이유립 등 여러 사람들의 보고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강단 학자들은 변조 또는 마멸된 글자의 원문도 찾지 않았으며, 해석을 위한 당시 사람들의 서글 어법 등에 대한 연구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안타까움을 느낀 사람들이 국사찾기협의회와 (사)한배달을 중심으로 2014년에 모여 정부와 학자들에게 자극을 줄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라도 새로 해보기로 합의하고 나름대로 분야별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호태왕비문연구회를 결성하여 자체 연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조 또는 탈각되기 전의 원문을 찾고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여러 탁본 중 대만 소장의 원석탁본과 일본인들이 칠한 백회가 떨어져 나가 더 많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게 된 1889년대에 채탁된 것으로 알려진 길림성 주운태의 탁본을 확대 복사하여 공유하고, 여러 책에서 중국, 북한 및 일본 학자들의 석문 16개와 해석문 7(재중 동포로 고문에도 능한 윤덕원 선생의 해석 포함)를 찾아 비교 연구를 위한 자료집으로 제작했다.

 

특히 글자 판독과 해석을 위해서는 연관되는 역사기록이 매우 중요하므로 삼국사』 『삼국유사』 『환단고기등의 기록은 물론 비문에 있는 내용이 거의 거론되는 고구려사 초의 관련 기록도 뽑아 자료집을 만들었으며, 계연수 이관집이 현장에 가서 필사했다는 광개토왕성릉비 결자징실도 석문비교표에 기록하여 원문을 찾는 데 활용했다. 뒤에 입수된 정인보의 석략도 참고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비용, 그리고 실력이 제한된 우리들만의 연구였기 때문에 더 많은 탁본을 접하기도 어렵고, 일본, 중국의 연구도 충분히 접하지 못하였고, 지명의 비정에 대한 의견 충돌, 연구회원들이 바뀌는 데 따른 문제도 있어 그 결과도 스스로 만족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한계가 있음도 솔직히 인정하지만, 일단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보아 오늘 발표를 하게 되었다.

 

▲ 주운태 원석탁본과 쌍구가묵본의 비교     © 편집부

 

 

'호태왕비연구회'의 연구방법 및 한계 

 

  호태왕비연구회에 분야별 전문인들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탁본이나 석문을 깊이 연구한 전문가가 많지 않았기에 학문적 전문성보다는 대중적 지식과 방법으로 문제점을 찾아 제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연구를 하기로 목표를 정하고, 박정학이 중심이 되어 탁본과 석문 및 <고구려사 초·략> 등 역사자료와 기존 학자들의 연구 결과 등의 자료들을 모아 자료집으로 만들어 공유하여 같이 보면서 토의를 했다.

 

탁본은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탁본 중 대부분의 쌍구가묵본은 무시하고, 이형구의 광개토대왕능비 신연구(동화출판공사, 1986) 부록에 수록된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부사년 도서관 소장 원석정탁본과 왕건군의 광개토왕비연구(임동석 역, 역민사, 1985) 부록에 수록된 1889년 탁본으로 알려진 주운태 탁본을 확대 복사하여 공유했다. 

 

석문은 한일의 16개 석문을 찾아 비교하기 쉽도록 행별로 비교표로 만들었다. 이때 260개 전후의 결자를 완전 보완한 석문을 중시하여 가장 최근에 완역본을 발표한 김덕중의 석문을 기준으로 삼고, 그가 학맥으로 삼은 김택영과 그 제자인 조소앙-김덕중으로 이어지는 김덕중 계의 석문과 김택영과 함께 연구했던 최초 해독자 만주인 영희 조봉의 석문을 그 다음으로 하고 

 

이어서 이유립의 대배달민족사(고려가, 1987) 2권에 수록된 계연수-이관집의 광개토왕성능비문징실’(약칭 결자징실’)을 많이 따른 이덕수-이유립으로 이어지는 이유립 계의 석문을 앞쪽에 배치하고 만주인으로 보이지 않는 글자를 상당히 많이 판독한 1934년 김육불의 석문(왕건군, 이형구의 책 부록, 1934奉天通志금석편 게재) 

 

우리나라 자료로서 이형구, 서영수, 구리시청 광장의 광개토태왕비, 1908년 발간된 증보문헌비고 36권의 내용과 일본 자료로서 1889년의 회여록, 제법 양심적 연구가로 알려진 水谷悌二郞, 조선사 편수회의 今西龍 등의 석문을 넣고, 이어서 북한의 박시형, 중국의 왕건군의 석문을 실었으며, 박시형이 뽑아 놓은 이체자와 광개토왕성릉비징실을 표에 포함시켜 서로 비교하기 좋도록 했다. 

 

판독과 해석을 위해서는 관련되는 역사기록과의 대비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삼국사』 『환단고기』 『고구리사 초·에서 광개토호태왕 때의 기록을 뽑아 비문의 내용과 비교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자료집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특히 고구리사 초·에 비문의 기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아 매우 유용했으며, 성헌식이 이 부분에서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 

 

▲ 호태왕비문의 바른 해석에 큰 도움을 준 <대배달민족사>와 <고구리사초략>                                  © 편집부

 

그리고 우리에게 고어가 있듯이 옛날 서글의 의미가 현재와 다르다는 것을 윤명부로부터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윤명부가 소지하고 있던 중국의 고한어 사전을 복사하여 공유했으며, 참고로 우리말 지명이나 인명 등 명사를 한자로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계림유사원문 연구를 함께 시작하여 마쳤다. 이 과정에서 음운학적으로 반절이나 이두식 용법이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일부는 그렇게 해석했지만 전체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능력의 한계를 실감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문에 나오는 지명의 현재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0159월부터 수경주원문 공부를 시작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당시 병력의 숫자 등을 보아 고구리와 백제의 전투도 한반도 안에서의 전투라고 보기에는 너무 대규모이므로 전투 지명이 한반도와 현재의 일본 열도는 아닐 것이라는 데는 대체로 합의를 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를 찾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러 학자들의 비정을 비교해보았지만, 가장 많은 비정을 해놓은 이유립의 경우도 같은 전투에서 한반도, 만주, 산동반도 지역까지 다양하게 비정하고 있는 등 믿기가 어려웠고, 대부분 학자들의 비정이 삼국은 한반도, 왜는 일본열도에 있었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 따르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명의 위치 비정은 수경주에 이어 한서지리지를 공부하기로 하고, 이미 자료집을 만들어 둔 상태이므로 그 연구까지 끝난 후에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하고 잠정적으로 보류했다 

 

다음으로, 판독이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숫자였다. 점령한 성의 수, 수묘인에서 지방별 국연과 간연의 숫자와 전체 숫자가 나오는데, , , , 등이 학자들 간 판독이 다르기도 하고 탁본을 확인해도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탁본과 전체 숫자를 고려하여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해석 연구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중국식 또는 우리나라 서글이 아닌 고대 우리(고구리)식 서글로 해석하려고 노력했으나 태학사문의 논리를 주장한 김덕중의 한계도 있지만 중간에 빠졌으며, 이 분야의 학설이 충분하게 연구되고 정립되어 있지 않다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연구회만의 제한된 능력과 재정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구를 하여 바른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은 능력 부족임을 실감하고, 문제를 명확하게 제기하여 앞으로 정부가 중심이 되어 제대로 연구를 하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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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30 [13:4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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