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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어디인가? (1부)
고구려의 요동·요서는 지금의 요녕성이 아※닌 북경 부근
 
황순종 고대사 연구가 기사입력  2017/02/03 [15:31]

1. 서론

 

고구려의 건국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서기 전 37년에 건국하였으며 그 도읍지는 졸본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병도 이후 학계에서는 그 도읍지 졸본의 위치를 압록강 북쪽의 환인현이라 주장하고, 그 건국시기도 주몽 때가 아니라 6대 태조왕 때에 고대국가로 성립하였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학계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견해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추종한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지를 압록강 유역으로 보며, 건국시기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태조왕 때라고 하여 백 년이나 늦추고 있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에서 건국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3국 모두 그 건국시기를 학계의 주장처럼 백 년 내지 수백 년 늦게 잡을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글을 통해 3국의 건국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기에는 지면이 충분하지 못한 관계로 고구려의 건국을 위주로 하여 부분적으로 백제와 신라에 관한 진실도 언급하고자 한다.

 

▲ 압록강 북쪽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일제식민사학자들     © 편집부

 

2. 고구려의 건국지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당시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울 때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는데······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 왔다. ····· 비류하 계곡 홀본 지방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북부여 천제 즉 단군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바로 고조선의 통치자인 단군의 직계 혈통이라는 뜻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북부여로부터 남하했으므로 북부여의 위치를 알면 고구려의 건국한 홀본(졸본)의 위치도 짐작할 수 있다.

 

북부여의 위치에 대하여는 사기』「화식열전의 다음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무릇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 사이의 도회지다. ····· 북쪽으로는 오환, 부여와 이웃 하였고, 동쪽은 예맥, 조선, 진번과의 이익을 관장하였다.”

 

여기서 부여(즉 북부여)가 연나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연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있다고 했다. 연나라의 중심이 지금의 베이징(北京) 부근이었으므로 그 북쪽의 북부여는 대략 롼허(난하)상류 유역인 허베이성(河北省) 동북단과 내몽고 자치구의 경계지역으로 추정된다. 윤내현도 이런 견해를 이미 밝혔다.

 

위 북부여의 남쪽에 있던 고구려의 도읍지 졸본은 어디쯤 되는 곳일까? 삼국유사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다. ·····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 (주몽은) 졸본주 (현도군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졸본이 요동군 및 현도군과 동시에 경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요동이 지금의 요동(압록강 북쪽의 랴오닝성 지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나라 당시의 이 옛 요동은 지금의 베이징 부근으로 연나라의 동북쪽 끝에 위치하였다. 졸본의 위치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압록강 북쪽의 환런(桓仁)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잘못이며 필자의 주장이 옳다는 근거를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우선 삼국사기지리 고구려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졸본은 대개 한 현도군의 경계요 대요국(거란족의 요나라) 동경의 서쪽이니 ······”

 

삼국유사와 같이 졸본이 현도와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가 고려시대 당시 요나라의 동경(지금의 랴오양, 遼陽)의 서쪽이라고 했다. 학계에서 말하는 환런은 랴오양의 서쪽이 아니라 오히려 동쪽에 있으므로 옛 졸본이 될 수 없으며, 졸본이 랴오양의 서쪽인 베이징 북쪽 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지리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의 위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처음 중국 북쪽 땅에 있다가 점차 동쪽으로 패수 곁에 왔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들은 고구려가 처음에 중국의 북쪽에 있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압록강 부근에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고구려가 중국의 북쪽인 허베이성 지역에 있던 사실을 올바로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뒤에 점차 동쪽으로진출하여 북한 지역에 이른 사실까지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학계의 설명대로 졸본이 압록강 변이었다면 뒤에 고구려가 남쪽으로패수 곁에 왔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의 찬자들은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으로 본 것 같은데 이는 큰 잘못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허베이성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대륙에서 활동한 것을 보여주는 많은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 <삼국사기> 모본왕이 점령한 지역인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은 하북성과 산서성 북부지역     © 편집부


첫째, 5대 모본왕 때의 기사로 다음과 같다.

“2년 봄, 왕이 장수를 보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습케 하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와 신의로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이때는 후한 초인 서기 49년으로 고구려가 침공한 군들은 베이징을 흐르는 융딩허(永定河)의 서쪽과 남쪽에 있던 지역들이며, 이 중 태원군은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태원시로서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가장 멀리 황허(黃河)에 가까운 곳이다. 모본왕이 이들 지역을 공격하게 한 것은 고구려가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만약 학계의 주장처럼 고구려가 압록강 변에 있었다면 이들 군까지 가기 위해서는 현도, 요동, 요서군 지역을 통과하여 수천 리를 가야 하는데, 현도 등 다른 군에서 한나라 군대와 충돌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매우 무모한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정황이 이러하므로 이병도는 위 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실제 이때 고구려의 세력은 능히 그렇게 멀리 중국 방면에까지 침략의 발길을 내키었을까가 무엇보다 문제이다. 그러므로 위의 사실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봄이 타당할 것같다.”

 

고구려가 당시 중국을 침공한 것이 아니라고 주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중국 측의 후한서고구려조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어 당시 고구려의 위상과 다물정신(고조선의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이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고대 요수는 지금의 난하라는 주장     © 편집부


다음으로 대륙의 고구려를 증언하는 중요한 기록은 6대 태조대왕 때의 일이다.

“3년 봄 2,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의 군사에 대비하였다.”

 

요서에 열 개나 되는 성을 쌓아 한나라에 대비했다는 이 기록은 고구려의 국력을 잘 보여주는 내용인 동시에 당시 고구려의 강역이 압록강 변에 치우친 나라가 아니었던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여기의 요서는 고구려의 요서를 말한 것이지만 한나라에도 요서군이 있어 그 위치는 지금의 베이징을 흐르는 융딩허(옛 요수)의 서남쪽이었다. 반면 고구려의 요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롼허 서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요서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요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한나라의 요서는 예로부터 지금의 요서 지방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위 기록이 생소하기만 하다. 따라서 이병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여기 요서는 의문이다. 이를 글자 그대로 한의 요서라면 이 때 한의 군현이 엄연히 존재하는 요동지방을 지나 이곳에 십 성을 쌓았다는 것이 되니 믿기 어렵다. 이는 필경 전성시대의 일을 잘못 이곳에 실은 것이 아니면 지명의 오기일 것이다.”

 

한나라의 요동군인 지금의 요동을 지나 그 서쪽 요서군에 고구려가 성을 쌓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강역과 한의 요서군의 위치를 모두 일본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잘못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멋대로 부정하는 비학자적이고 비양심적인 행태가 나오는 것이다.

 

또 전성기의 일을 잘못 알고 태조대왕 때의 일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억지 주해를 하며 삼국사기를 폄훼하였으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전성기인 미천대왕이나 광개토대왕 때의 일이었다면 중국의 한나라는 이미 없어지고 다른 왕조 때였기 때문에 한의 군사에 대비하였다고 썼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 위 발제문에서의 졸본의 위치 주장은 본지의 견해와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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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3 [15:3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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