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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간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한사군은 허구 (4부)
한무제가 참패한 전쟁 이후 한사군이 설치될 수 있나?
 
편집부 기사입력  2017/02/05 [16:44]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왜냐하면 기자와 위만은 최초에는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이었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사군은 한나라에서 직접 식민지를 설치해 통치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사군은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배하려는 일제가 이를 강조해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옛 조선민족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은 우매한 민족이므로, 지금의 조선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허구의 한사군 이론이 해방 68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고 있어 큰 문제라 하겠다.

 

(1) 한사군전쟁은 한 무제가 참패한 전쟁

 

  한사군전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우거는 세력이 커지자 그동안 자신을 지원했던 한나라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이러한 우거를 꾸짖기 위해 사신 섭하(涉何)를 보냈는데, 섭하가  귀국길에 우거의 신하를 죽이고는 돌아가 보고하자 한 무제는 섭하의 공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거가 섭하를 기습공격해 죽여 보복하자, 화가 치민 한 무제가 군대를 보내 이를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온 선봉장 졸정다(卒正多)가 참수당했고, 육군과 수군 역시 크게 패해 지리멸멸하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 무제는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우거를 달래려고 횄다. 우거는 태자에게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가서 무제에게 항복하는 척하다가 기습공격하려고 했다. 그 낌새를 알아챈 위산이 병사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태자는 그냥 회군해버리고 만다. 그러자 우거와의 선린외교를 갈망했던 한 무제는 이를 망쳐버린 위산을 처형해버린다.


  전쟁은 계속되고 한나라 군사들이 계속 참패하자 한나라 진영에서는 두 장수가 서로 반목하게 되고, 이를 염려한 한 무제가 사신 공손수(公孫遂)를 보내 교통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공손수는 육군 장수의 말만 듣고는 수군 장수를 체포하고는, 육군과 수군을 하나로 합친 후 사후보고하니 화가 난 한 무제가 공손수를 죽여 버린다.

 

한나라가 다시 맹공을 퍼붓자 두려움을 느낀 조선의 5명 대신들이 작당해 우거와 성이장군을 죽이고는 한나라에게 항복하자 전쟁이 끝났다. 이로써 번조선은 평정되었고 항복한 5명의 조선 대신들을 제후로 봉하고는 그 땅을 나누어 준다. 한 무제는 참전했던 두 장수를 기시(棄市)라는 극형에 처하려 했으나 수군 장수 양복은 속전을 내고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목숨을 건진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 맨 마지막에 “결국 양군이 함께 치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는 문구에서 이 전쟁은 한나라가 참패한 전쟁임을 인정했다.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극형을 받은 장수들만이 있는 이 전쟁은 과연 누가 이기고 누가 진 전쟁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 전쟁의 결과로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 한나라에서 참전했던 장수들이 모두 죽은 전쟁 이후에 어찌 한사군이 설치될 수 있단 말인가!     © 편집부

 

(2) 한사군 이론에 대한 비판

 

  이러한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 나중에 중국학자들에 의해 곡필 왜곡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위 <사기>의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以故遂定朝鮮爲四郡) 삼을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장은 기후, 최는 온양후로 봉했다.”라는 기록을 약 180년 후에 나온 <한서>에서는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하였다”라고 다르게 적었다. 즉 조선을 평정(平定)했다는 것이 조선을 멸망(滅亡)시킨 것으로 바뀌며, 자치령인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식민지인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변조되는 것이다.  


  참고로 사마천의 <사기>는 44년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국의 땅을 쳐서 군현으로 삼기 훨씬 전에 저술된 사서이고, 반고가 쓴 <한서>는 그 이후에 저술된 사서이다. 그래서 <사기>에는 ‘낙랑’이라는 단어가 없고, <한서>에는 ‘낙랑’이 있는 것이다. 한사군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마천이 눈으로 직접 보고 적은 <사기>의 내용을 후대에 반고가 <한서>를 쓰면서 낙랑군으로 대변되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임의로 역사왜곡한 것이다. 이후 사서들이 모두 따라 적고 있어 마치 한 무제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된 것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B.C 108년 한 무제 때 설치된 한사군이 고구리 미천왕 14년(313)까지 420년간 존속했다는 것은, 전한과 신나라와 후한과 위·오·촉의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西晉)에 이르기까지 무려 본국의 7개 왕조가 계속 바뀌는데도 멀리 있는 식민지 한사군만 줄기차게 살아남아 존재했다고 하는 것으로 삼척동자가 들어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는 몸뚱이는 죽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살아 계속 이어진다는 것과 같으며, 뿌리와 줄기가 없는 나무 가지에 계속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중국의 역사찬탈음모인 동북공정의 논리에 거름을 주는 꼴이라 할 것이다.

 

▲ 설사 한사군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하남성 제원시 일대였던 것이다.     © 편집부

 

  결론을 내리자면, 낙랑군으로 대변되는 한사군은 전한 때 설치된 적이 없었으며, 설사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잠시 존재했을 뿐이다. 낙랑군은 B.C 169년부터 232년간 존속했던 최씨의 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변조시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인 낙랑국은 자명고가 찢어지면서 고구리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얼마 후 44년 후한의 광무제가 임자 없는 그 땅에 쳐들어와 잠시 군현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그러나 11년 후 태조대왕이 요서 10성을 쌓으면서 큰 뿌리가 뽑혔다. 이렇듯 잠시 존재했던 낙랑군이 중국 사가들의 붓장난에 의해 앞뒤로 마구 늘어나면서 400년 넘게 존재했던 것으로 왜곡된 것이 한사군의 실체이다. 이후 고구리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잔존세력이 잠시 부활된 적은 있으나 규모도 크지 않았고, 토착세력에 의한 것이지 본국에서 지배자가 와서 식민통치를 한 것이 아니다. 여하튼 이 세력들은 미천왕 때 거의 청소되고 민족의 영웅 광개토태왕 때 완전 소멸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한사군전쟁이 일어난 무대인 패수는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 아니라 중원 깊숙이 있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이며, 한나라에 항복한 조선 대신들이 봉지로 받은 곳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라는 것이 밝혀졌다. 패수는 한사군전쟁의 무대일 뿐만 아니라, 고구리의 남쪽 경계로 광개토호태왕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말은 조선과 고구리의 영토가 패수까지였다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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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5 [16:4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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