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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와 대수를 건너가 세운 백제 건국지를 찾아서 (2부)
백제의 건국지는 낙랑군의 서쪽 땅으로 북경 근처
 
황순종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7/02/28 [18:40]

지금까지 밝힌 고구려의 위치가 타당한지 여부를 백제의 건국지를 살펴봄으로써 검증해 보기로 하겠다. 추모대왕이 도읍한 곳이 졸본이었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졸본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과정을 삼국사기에 일설은 시조가 온조라 하고 다른 일설은 비류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비류의 시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를 세움만 못하다.’고 하고,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거 느리고 패수,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 한성백제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온조와 비류의 남하 행렬도. 맨 앞이 비류와 온조 가운데가 모후인 소서노이다.  ©

 

여기서 비류 일행의 남하 경로를 추정함에 있어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패수와 대수라는 두 강의 이름이다. 이 두 강은 모두 낙랑군을 흐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나라의 낙랑군이 어디인지를 알면 백제의 건국지를 알게 된다. 낙랑군이나 패수의 위치는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명인데, 일본 식민사학자들이나 우리 학계에서는 이 지명들이 북한 지역이었다고 아직도 잘못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 지명들이 어디인지 밝히기 전에 우선 식민사학의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부터 논하겠다이병도는 1930년대에 발표한 삼한문제의 신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비류와 온조의) 남하경로가 금일의 황,평 양도의 길을 취하였던 것은 저 비류 전설 중에 패수, 대수를 건넜다는 것으로도 물론 알 수 있지만 그들의 근거지 가 이와 같이 서해안에 병재했던 사실로도 짐작된다.”

 

이 글은 우선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패수, 대수의 위치를 문헌적으로 먼저 밝히는 것이 순서인데도 낙랑군의 위치가 북한지역이라는 전제하에 두 강은 당연히 황해도, 평안도를 흐르는 강으로 단정 짓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의 주장에는 이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류가 한의 낙랑군을 지나게 된다는 모순이다. 중국의 군현 지역을 비류일행이 통과했을 것으로는 이병도 자신도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낙랑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대신 생뚱맞은 현대어인 황해도, 평안도를 들먹였다.

  

▲ 백제는 마한 땅에서 세워졌다.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게 일제식민사학이다.© 편집부


이제 패수와 대수를 건너 와 세운 백제의 건국지가 어디인지 보기로 하겠다. 위에서 본 삼국사기의 구절에 이어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북사(北史)수서(隋書)에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손에 구태란 이가 있어 인신(仁信)에 돈독하였다. 처음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으며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하여 백제가 건국된 곳을 대방군이 있던 옛 땅이라고 하였다. 대방군이란 낙랑군의 남부 지역을 분할하여 설치한 곳으로 원래 낙랑군 경내였다. 그러므로 낙랑군의 위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낙랑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두 가지 근거만 보겠다.

 

첫째, 속현 중 하나인 조선현에 대하여 장안(張晏)사기』「조선열전을 주석하면서 습수, 열수, 선수의 세 강이 흐르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중 습수에 대해 중국의 진교역(陳橋驛)수경(水經)주 교증(2007)의 서문에서 베이징과 톈진을 흐르는 지금의 융딩허(영정하)라고 밝혔다.따라서 이 세 강이 흐르는 낙랑군 조선현은 보하이(渤海)만의 서쪽 해안 지역임이 드러난다. 이병도 이후 학계에서는 조선현이 평양 부근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문헌적 근거를 댄 적이 없다.

 

둘째, 낙랑군의 위치를 한서』「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의 북쪽 및 동북쪽에 위치한 15개 군들을 보면, 군 안에 도위를 두었는데 대부분 동부도위와 서부도위를 두었으며 또 중부도위를 둔 곳도 있다. 그러나 낙랑군만은 유일하게 동부도위 외에 남부도위를 두었다. 이는 낙랑군만의 지리적 특징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낙랑군이 발해 서북안의 톈진을 중심으로 역형을 이룬 데서 기인한다. 이 결과는 위에서 찾은 결과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명백해 지는 사실은 학계에서 말하는 평양 낙랑설은 동부 및 남부도위를 둘 지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 대방고지에 대하여는 자치통감유성현과 노룡현 사이라고 기록했는데 유성현은 요서군에 있던 현이며, 노룡현 역시 통전에 따르면 한나라 때의 요서군 비여현이었다고 한다. 즉 대방고지란 한나라 요서군 지역이었으며 그곳은 지금의 요서가 아니라 융딩허와 베이징의 남쪽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설사 지금의 요서라 하더라도 그곳이 대방이라야 하며, 결코 황해도는 될 수 없다. 대방고지의 백제는 낙랑군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제 초기의 두 기록을 통해 확인하기로 하겠다.

 

우선 시조 온조대왕 때의 일이다. “13년 여름 5, 왕이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라고 했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백제가 보하이만 서안에 있던 낙랑의 서쪽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여기서도 학계의 허구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있고 낙랑이 대동강 유역이라면 백제는 낙랑의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낙랑의 서쪽에는 백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해바다만 있을 뿐이다.

 

다음은 8대 고이대왕 때의 기록이다.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왕준이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민을 쳐 빼앗았다.”

 

이때는 서기 246년으로 낙랑 남쪽에 대방군이 있을 당시였다. 학계의 주장대로 만약 평안도의 낙랑 남쪽에 황해도의 대방, 그리고 그 남쪽에 백제가 있었다면 백제에서 대방을 거치지 않고 낙랑을 바로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하이만의 낙랑 서쪽에 백제가 있었기에 대방을 거치지 않고 낙랑을 바로 친 것이다.

 

▲     © 편집부

 

지금까지 본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를 천문 기상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와 바교해 보기로 하겠다.

박창범 교수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3국의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이러한 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 관측지가 신라 후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대륙임을 밝혀냈다. 즉 고구려의 관측지는 내몽고자치구와 그 남쪽, 백제는 보하이만 유역 그리고 신라는 양쯔강(楊子江) 유역으로 결론지었다. 다만 신라의 경우 787년 이후는 한반도 남부로 나타났다.

 

한편 기상청 출신의 정용석은 3국의 화산, 지진, 가뭄, 홍수, 눈 등의 기상기록을 분석하여 3국이 모두 대륙에 있음을 밝혔는데, 그 결과 또한 위의 천문학적 분석과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면 백제의 경우 14회의 지진 기록이 있는데 그 중 네 번은 땅이 갈라지고 집이 허물어지는 등 인명 피해도 있었다.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강 이남이 지금도 강한 지진대에 속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그의 연구가 타당성이 있음을 증거한다.

 

 

※ 위 발제문에서의 백제건국지 위치 주장은 본지의 견해와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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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28 [18:4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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