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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고국양제와 후연과의 치열했던 요동공방전 (4부)
소수림제와 공방을 벌린 후연의 활동무대는 산서성 남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3/08 [12:45]

소수림제가 14(384) 11월에 46세의 나이에 갑자기 붕어할 당시 장자 강()10살의 차자 담덕(談德)이 있었으나, 유언을 남겨 동북아우인 43세의 태제 이련(伊連)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고국양제(故國壤帝)로 또 다른 이름은 어지지(於只支)이다. <삼국사기>에는 소수림왕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과는 완전히 다르다.

(담덕의 출생에 대해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7465참조)

 

고국원제의 소후(후궁)였던 해()후가 꿈에 용산에 올라 추모대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 육족오(六足烏)로 변했고, 모용황을 받아들여 임신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하니 점쟁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했으나, 고국원제의 모후였던 주태후 혼자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련은 추모(주몽)가 현신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용황이 침략해 환도를 점령하고 돌아갈 때 이련은 해후를 따라 연나라로 끌려갔었다. 모용황이 해후의 궁에 올 때마다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해 귀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연나라 대신들이 모용황에게 이련을 죽이라고 주청을 하니 천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 임의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인지라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라고 하더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련과 해후를 고구리로 돌려보냈다.

 

고국양제는 어릴 때 신선을 즐겨 찾고 산천을 유람했으며, 부모님과 형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장성해서는 백성들의 괴로움에 대해 물었으며, 새로운 율령을 정했고, 종친의 자녀를 교육함에 부지런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미리 앞을 내다보고 그 요점을 처결하니, 소수림제가 그를 아끼며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분신이다.”라고 했으며, 정사를 맡기고는 묻지 않는 적이 많았으니 나라사람들은 이련을 버금황제라고 불렀다.

 

▲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의 고국양제로 분한 독고영재     © 편집부

 

고구리와 후연과의 치열했던 요동공방전

 

<삼국사기>에는 고국양왕 2(385) 을유 6, 왕이 군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했다. 이에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했다.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했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해 돌아왔다.” 라는 기록이 있다.

 

모용수(慕容垂)는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로 모용황 사후 형제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망명해 그 휘하장수로 활약하다가, 통일을 꿈꾸던 부견이 383년 동진에게 비수(淝水)에서 크게 패하자 부견을 보호하면서 퇴각에 성공한다. 부견이 죽기 직전에 자립을 도모해 후연(後燕)을 세우는 인물이다.

 

당시 오호십육국시대의 절대강자였던 전진이 약화되어 점점 망해가자 384년에는 모용수가 후연(後燕), 모용충이 서연(西燕), 강족 요장이 후진(後秦), 385년에는 선비족의 걸복국인이 서진(西秦), 386년에는 저족 여광이 후량(後凉) 등을 세워 중국은 다시금 동진 포함 6개국이 할거하는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의 후연 초대 왕 모용수의 모습                                                          ©편집부

 

<삼국사기>에는 고구리가 모용수가 세운 후연의 요동을 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은 이와는 다르게 황상이 아우 붕련에게 4만 명을 이끌고 가서 현토(玄免)성과 장무(章武) 등을 쳐서 빼앗으라 명했더니, 그곳의 장수 학경 등 10명의 목을 베었으며 용성(龍城)을 침공해 남녀 1만여 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무수히 많은 진귀한 보물과 값진 노리개들을 노획했다. 부견이 업을 깨뜨린 이후로 요동 땅은 (전진)과 마주하며 지키기만 하여 전투를 해본 적이 오래되니, 거란족이 그 땅을 넓게 깔고 앉았기에 지금에 이르러 군대를 보내 두 성을 되찾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견이 업()을 깨뜨렸다는 말은 전연을 멸망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연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업은 하남성의 동북단 안양시 임장(臨漳)현 서남쪽 40리로, 지금의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역으로 산서·산동성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용성은 전연의 2번째 도읍이었다.

(용성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4544참조)

(현토성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9858참조)

 

장무는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유주의 발해군에 속한 현을 말하는 것이다.

(勃海郡 발해군)高帝置莽曰迎河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二十五万六千三百七十七口九十万五千一百一十九县二十六浮阳莽曰浮城阳信东光有胡苏亭阜城莽曰吾城千童重合南皮莽曰迎河亭侯国章武(장무)有盐官莽曰桓章中邑莽曰检阴高成都尉治也高乐莽曰为乡参户侯国成平虖池河民曰徒骇河莽曰泽亭侯国临乐侯国莽曰乐亭东平舒重平安次脩市侯国莽曰居宁文安景成侯国束州建成章乡侯国蒲领侯国(발해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0798참조)

 

당시 요동 땅은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활동무대로 전연이 전진의 부견에게 망한 이후 거란족이 들어가 점유하고 있었다. 이에 고국양제는 그곳에 있던 거란족을 몰아내고 유주에 속하는 현토성과 장무성을 되찾는 쾌거를 올렸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거란족에 대한 언급은 없고 후연을 세운 모용수가 대방왕 좌로 하여금 지키게 했던 용성을 격파한 것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 당시 모용선비 연나라의 활동무대는 산서성 남부     © 편집부


          

이어지는 <삼국사기>에는 겨울 11, 연나라 장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해 요동과 현토 두 군을 회복했다. 예전에 유주·기주 등지의 유랑민 다수가 고구리에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의 방연을 요동 태수로 삼아 그들을 무마했다.” 즉 후연이 고구리에게 빼앗겼던 요동과 현토를 다시 수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그런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8월에 모용수는 용성이 떨어진 것을 듣고 열옹에 있는 자기 동생 모용농을 불러 범성을 거쳐 용성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그의 행적이 워낙 신속했기에 고구리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3만 정병을 몰래 훈련시키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분묘(墳墓)를 손보는 것처럼 위장해 싸울 뜻이 없는 척하다가, 11월에 돌연 장무를 공격해오니 고구리 장수 뉴비가 패해 죽었고, 군대를 돌려 현토성으로 쳐들어오자 용궐이 맞싸워 이를 깨뜨렸다. 이에 모용농은 방연을 장무령으로 삼아놓고 자신은 요동태수를 칭하고, 유주와 기주에서 투항해 온 백성들을 불러 꼬드겼으나, 많은 이가 황상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열옹(蠮翁)은 용성 서쪽에 있는 요새이고, 범성(凢城)은 현재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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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08 [12: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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