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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고국양제가 묻힌 곳은 산서성 남부 부산현 (5부)
고국양은 양각산(羊角山)의 동쪽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4/10 [02:43]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3852월 백제 침류왕이 한산에 절을 세우고 도승 10명을 두고는 11월에 죽자 태자 아신(阿莘)이 어려 숙부 진사(辰斯)왕이 즉위했는데,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사람됨이 굳세고 날래며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왕후 65(385)에 백제 왕자 아화(阿花=아신)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반면에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국양제 2(385) 을유 2, 백제 침류왕이 한산에 절을 짓기 시작해 10월에 완성하고, 10명으로 하여금 승려가 될 수 있게 허락하고는 죽어 그의 아우 진사가 뒤를 이었다. 강하고 용맹했으며 총기도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도 있었던 진사를 침류왕의 첩 가리(佳利)가 좋아해 새 남편으로 맞아들여 정사를 전횡했고 자신의 아들 아신을 후사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단순히 아신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권을 쥔 모친이 시동생 진사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올렸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류백제계인 계왕의 측근들이 왜를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재야사학의 가설은 진사왕의 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달아난 계왕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왜 열도를 정벌했으며, 근구수왕은 침류 태자를 왜왕으로 임명해 미리 통치실습을 시켰고 나중에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뒤를 이어 본국 백제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사가 형 침류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니, 이에 격분한 아신 태자는 왜로 건너가 비류백제계인 응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응신 15(390년 진사왕 6)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고 은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신이 백제왕을 응신은 왜왕을 하기로 서로 밀약을 맺고는, 아신이 왜군을 이끌고 백제로 돌아와서는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기록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진사왕이 사냥터에서 조카 아신에게 죽는 장면     © 편집부

 

고구리와 백제의 공방전

 

고구리 고국양제와 백제 진사왕은 자주 충돌했다. 고국양제 3(386) 병술 8, 고구리가 백제의 관미성(関彌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백제 진사왕은 고구리의 침입에 대비해 15살 이상의 장정을 뽑아 관방(關防)을 설치했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해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이르게 했으며 서쪽으로는 해()에 다다르게 했다. 관방이란 중국의 장성과 같이 국경의 방어를 위해 설치하는 성벽 등의 시설을 말하는 것이다. 청목령과 팔곤성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듬해(387) 정해 9, 고국양제는 장수 해성에게 명을 내려 말갈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관미성을 공격하게 하니, 백제의 달솔 진가모와 은솔 두지가 고개에서 막다가 패하고는 성안으로 들어가더니 겁을 먹었는지 나오질 않아 관미성을 포위하기는 했으나 빼앗지는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고구리가 아닌 말갈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달솔 진가모(眞嘉謨)는 침류왕의 첩이었다가 진사왕의 부인이 된 ()가리의 친오빠로 용감했으나 전투에 지면 설욕을 위해 무모하게 군사를 사용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너무 무모하다고 평했다. 실제로 진가모는 당시 백제의 최고 권력자였던 여동생 가리의 힘을 믿었는지 진사왕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국양제 5(388) 무자 4, 고구리에 가뭄이 심해 황상이 기우제를 올렸더니 7일 만에 비가 조금 내렸다가 가뭄이 계속되어 백제 정벌까지 중지했다. 동궁 담덕(광개토호태왕)이 새벽에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더니만 새들도 비 오기를 바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8월에는 황충(메뚜기 떼)까지 나타났다.

 

이듬해 6(389) 기축 2월에 신라 역시 역병이 크게 돌았고 흙이 비처럼 내려 곡식이 영글지 않았고, 백제 또한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제 진사왕은 고구리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가모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으나 고구리 장수 용릉에게 패하고는 돌아갔다. 9월에는 고구리가 아단(阿旦)성에서 백제의 은솔 두지를 크게 깨뜨렸다.

 

고국양제 7(390) 경인 9, 백제의 진가모가 고구리의 도압성(都押城)을 습격해 2백 명을 잡아가니, 진사왕이 크게 기뻐하며 진가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고는 그를 위해 구원(狗原)에서 7일간이나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도압성이 아니라 도곤성(都坤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압선과 도곤성과 구원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듬해(391) 신묘 4, 고구리 장수 해성이 말갈병 2천을 이끌고 백제의 적현(赤峴)성과 사도(沙道)성을 빼앗았다. 이때 왜가 가야와 신라에 침입해 백제의 남쪽까지 이르렀는데도 진사왕은 가리와 함께 궁실에서 사치하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기이한 조류를 기르고 있었다. 이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나라 서쪽에 있는 큰 섬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왜가 물러나자 돌아왔다가 횡악(橫岳)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비웃을까 걱정하여 사슴을 잡는다는 핑계를 둘러댔으니, 그의 기세의 허약함이 이토록 심했었다.

 

진사왕이 들어간 횡악(횡령)은 어디인가?

 

횡악(橫岳)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같은 뜻인 횡령(橫嶺)에 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백제 근초고왕 때 요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횡령 : 거용관의 서북 또는 산서성 우향현 동남 10리에 있는 왕관곡이다. (横领 : 在察哈尔延庆县南四十七里当居庸关之西北为往来要路明时设兵戍宁。②在山西虞乡县东南十里即王官谷详见王官谷条)

 

거용관은 탁록과 함께 유주의 상곡군에 속한 현이므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 염지 부근이다.

(上谷郡 상곡군)秦置莽曰朔调属幽州(유주)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거용관) 雊瞀夷舆莽曰朔调亭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횡령 즉 왕관곡(王官谷)에 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요서군에 속한 루현(壘縣)에 갈석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중조산이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번역) 산서성 우향현 동남 10리 중조산 안에 있는 석루곡의 서쪽으로 그 땅의 현재이름이 횡령이다. 석루곡의 북쪽은 우향이고, 남쪽은 예성이다. 한나라 옛 루현(요서군)이다.

 

(원문) 王官谷 : 在山西虞乡县东南十里中条山中石楼峪西今名其地为横岭峪北虞乡峪南芮城,《唐书司空图传图居中条山王官谷有先人田遂隐不出作亭观素室悉图唐兴节士文人名亭曰休休,《元王恽游记中条山又东得王官峪汉故垒也有唐司空表圣之别业 

 

▲ 검은색은 주요도시의 현 지명, 청색은 신성과 남소성, 적색이 고국양과 횡령     ©편집부

 

 고구리 고국양제와 백제 진사왕의 죽음

 

8(391) 5, 고국양제가 온탕에 가서 술을 마시다 붕어했다. 이때 동궁(담덕)은 서쪽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도착했으나, 황상은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후에게 옥새를 전하라하고는 숨을 거두고 만다. 동궁은 울부짖으며 온궁의 빈전에서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호태왕으로 이때 나이 18세였다 

 

사관은 애통해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오호 슬프도다. 황상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으며 덕행을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세간의 인심에 정통했으나, 어릴 적부터 호색하고 술에 젖어 세상사에 뜻이 없었다. 정사를 함에 있어 큰일은 해극에게 맡기고 작은 일은 연도에게 맡겼으며, 동궁을 시켜서 이들을 감독하게 했다. 이때에 이르러 술을 마시다가 세상을 버렸으니 애석하다 할 것이다. 춘추 49세였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의 고국양왕의 죽음과 즉위하는 담덕(광개토태왕)     © 편집부

 

6월에 대행을 고국양(羊角山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순장을 금하고 진귀한 보물도 부장하지 않았으며, 단지 능지기를 두고 비석만을 세워 그 공덕을 기록했다. 7, 신라의 내물 이사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며 부의하고는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했다. 고구리 고국양제가 붕어한 해 11월 백제에서는 진사왕이 죽는다.

 

광개토태왕의 숙부 고국양제가 묻힌 고국양은 양각산(羊角山)의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양각산의 위치에 대해 산서성 부산현 남쪽으로 <환우기>당나라 무덕 3년 양각산 아래서 신 같은 사람을 보았기에 신산으로 현을 바꿨다.’ 구 소위 용각산이다. 당나라 때 개명했다.

(羊角山 : 在山西浮山县南,《寰宇记唐武德三年见神人于羊角山下因改县为神山旧谓之龙角山唐时改名)”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산현은 평양성이 있었던 임분시의 동남쪽에 있는데, 유주의 현토(玄免)군 지역으로 보인다. 부산현 서남쪽 익성현에 남소성(南蘇城)이 있었고, 그 서남쪽 곡옥현에 신성(新城)이 있었다.

(남소성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9858참조)

(신성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027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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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0 [02:4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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