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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로 풀린 광개토태왕 비문 17세손의 비밀 (1부)
광개토태왕의 외가는 가깝고도 막강했던 황족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5/10 [22:13]

고국양제가 즉위 8년 만에 붕어하자 소수림제의 둘째 아들인 담덕(談德)이 보위에 오르니 이분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삼국사기>에는 호태왕비문에 새겨져 있는 기록이 생략되어 있는데다가, 광개토태왕을 위대한 정복군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 중화사대주의에 물든 조선왕조과 일제에 의해 고의로 지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374년생인 담덕은 부황인 소수림제가 384년에 붕어할 당시 10살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바로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인 고국양제의 재위 8년 후에 18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소수림제에게는 동궁 시절 낳은 25(359년생)의 장자 강()이 있었으나, 소수림제가 제왕의 자질이 출중한 차자 담덕에게 보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자 강은 양보하고 선종(仙宗)이 되어버린다.

 

강은 소수림제의 동궁 시절 원래 동궁비였던 연()씨의 소생이었고, 담덕은 천강(天罡)황후 연()씨의 소생이다. 천강은 원비 씨가 살아있었음에도 368년에 두 번째 동궁비가 되었다가 나중에 두 황제의 황후가 되고 아들 담덕이 황제가 되자 상태후가 되는 여인이다. 천강이 여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그녀의 집안 때문이었다. 천강태후의 부친은 고국원제의 동생인 천원공 림()이다. 즉 호태왕의 조부와 외조부가 서로 형제였던 것이다.

 

천강태후는 황후 시절 꿈속에서 신록(神鹿)과 교호해 담덕을 낳았는데 그 모습이 그윽하면서도 크고 듬직했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가졌고, 어릴 적부터 군대의 일을 좋아해 병서를 읽었으며, 정사를 감독하게 하니 고국양제로부터 작은 일을 위임받은 연도(淵鞱)조차 무척 두려워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은 어려서부터 웅위하고 젊잖으며 억매이지 않는 뜻이 있었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소수림제가 동생인 고국양제에게 보위를 물려주면서 다음 보위를 담덕에게 물려주라고 부탁해 고국양제 3(386)에 담덕은 정윤(동궁)으로 책봉된다. 아마 그렇게 된 이유는 천강황후의 집안이 황족 중에서도 워낙 막강한 성골(聖骨)인데다가, 고국양제에게 친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는 천지신명의 보살핌과 소수림제의 선견지명으로 광개토호태왕 때 이르러 역사상 가장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즉위한 호태왕은 토산(吐山)을 황후로 세우고, ()태자를 태보(영의정)으로, 연억(淵億)을 좌보(좌의정), 붕련(朋連)을 우보(우의정), 면형(免衡)을 중외대부로 삼았다. 면형은 담덕이 동궁으로 있을 때 여러 번 의롭게 직간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발탁되어 연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7월에 신라 내물왕이 사신을 보내 선황을 조문하고는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     © 편집부

 

호태왕에게는 토산황후 이외에 또 한명의 황후가 있었다. 호태왕이 천강태후에게 백제(伯帝=소수림제)의 딸 평양(平陽)은 짐을 섬김에 정숙하여 지금 다시 딸을 낳았고, 여러 번 자신의 동생 강에게 권해 짐에게 보위를 양보하도록 했습니다. 그 공이 적지 않아 황후로 삼으려고 합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고하니, 태후는 천하의 일은 오로지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것인데, 노첩이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황상은 이에 평양을 신궁(新宮)으로 맞아들여 황후로 책봉하고 모든 것을 토산황후의 예와 같게 했다.

 

평양은 젊어서는 선약(仙藥)하는 일을 즐겨 했고, 요조숙녀와 같은 덕이 있어 행실은 맑았고 정조를 지켜 나이가 24살이 넘도록 다른 남자를 곁눈질하지 않았다. 호태왕이 잠저시절에 평양을 궁인으로 삼고 승은을 내려 가련 공주를 낳았고, 이제 다시 딸을 낳아 황후가 된 것이다. 나이 31세의 평양후는 성스러운 덕이 있어 호태왕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평양후와 꼭 의논하고 매사를 실행했다고 한다.

 

황상이 태후를 모시고 두 황후와 함께 졸본에 있는 시조의 사당을 찾아가 즉위했음을 고하고, 종척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죄인들을 풀어주고, 사궁(四窮: 홀아비·과부·고아·무자식노인)들을 구휼하고, 백성들에겐 재화를 나눠주었으며, 효행한 자들을 포상했다.

 

이어 소수림제의 원비인 연()씨를 연태후로 올리고, 연공 및 궁실·거마·노비를 내림을 태상후 해씨와 같게 했다. 평양의 동생 강()을 선왕으로 삼고, 도장을 3일간 열어주었다. 연도(淵鞱)에게는 책성(柵城)을 지키라고 명했다. 한때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었던 이복형 강과 자신을 경계했던 연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보면 호태왕이 얼마나 큰 그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 2007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으로 분한 배용준씨     © 편집부


 

비문의 17세손과 일치하지 않는 <삼국사기>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전략) 17세손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 이르러 18세에 등극해 영락태왕이라 했다(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라는 문구가 있다. 17세손인 호태왕의 정식명칭은 국강상(나라의 북두칠성으로) 광개토경(영토를 넓게 확장한) 평안호태왕(평안하고 좋은 태왕)으로 18세에 보위에 올랐고 연호를 영락으로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호태왕은 <삼국사기>의 고구리 역대기에 의하면 19() 왕이고, <고구리사초략>에 의하면 20() 황제로 기록되어 있어 비문에 새겨진 17세손(世孫)이라는 문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참고로 <고구리사초략>에는 <삼국사기>5대 모본왕과 6대 태조대왕 사이에 신명선제(神明仙帝)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대가 신명선제이고 7대가 태조황제라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리사초략>에 의하면 호태왕은 13세손이 된다. 1추모왕(1), 2세손 유리왕(2), 3세손 대무신왕(3)과 민중왕(4), 4세손 모본왕(5)과 태조대왕(6)과 차대왕(7)과 신대왕(8) 그리고 신명선제(6), 5세손 고국천왕(9)과 산상왕(10), 6세손 동천왕(11), 7세손 중천왕(12), 8세손 서천왕(13), 9세손 봉상왕(14), 10세손 미천왕(15), 11세손 고국원왕(16), 12세손 소수림왕(17)과 고국양왕(18) 이후 13세손이 광개토태왕(19)이다. 왜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걸까?

 

이러한 불일치의 이유는 비문의 17세손에는 고구리의 역대기에 주몽과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의 혈통관계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이 고주몽의 고조부로 해모수--> 고진--> ? --> 불리지--> 고주몽으로 혈통이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위 13세의 고구리 역대기에다가 북부여의 4세를 합치면 비문의 17세손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다. <북부여기> 기록이 참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 광개토태왕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로부터 17세손     © 편집부

 

호태왕 비문에 기업을 닦은 시조 추모왕의 출자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이라는 문구에서 고주몽이 북부여 천제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으며, <단군세기> 맨 끝에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의 고향인 高句麗로도 불리었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는 북부여가 사용한 또 다른 국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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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5/10 [22:1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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