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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을 북한점령의 명분으로 사용하려는 시진핑 (3부)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실상은 중국이 한국의 동네북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6/16 [17:31]

1년 반 전인 201511, 시진핑은 지금까지 중국군을 구성하고 있던 7개 대군구(大軍區)5개의 전구(戰區)로 재편하면서 통합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중국군의 지휘시스템을 지역관리 체제에서 중앙통제 체제로 대폭적으로 개혁하면서, 그해 국방예산으로 한국의 44배나 되는 1442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 중 가장 핵심은 한반도 유사시 투입될 북부전구(北部戰區)의 개편이었다. 과거 동북삼성(만주)을 관장하던 심양(瀋陽)군구를 주축으로 해서, 산동성과 황해 바다를 관장하는 제남(濟南)군구와 종전 북경군구의 북부인 내몽고 지역을 포함시켜 확대·재편하여, 명실공이 육··3군 통합군 체제를 완비한 가장 강력한 군구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2017 ·미 연합훈련 기간 중 돌발사태 발발에 대비해 북부전구의 모든 예하부대에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4개 집단군 총병력 43만 명 가운데 15만 명을 북한 국경지역으로 집결시켜 일단 유사시 북한의 핵시설과 평양을 점령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시키고 있다.

 

▲ 중국군의 핵심은 육·해·공 3군 통합군인 북부전구       © 편집부

 

 초대형 레이더로 한반도를 감시하면서도 시진핑은 한국의 사드배치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보복하고 있다. 또한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역사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이다.”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중 정상회담 후 북한이 6차 핵실험 등 추가 도발을 할 경우 대북 원유공급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혔다

 

이는 시진핑이 북한 땅을 중국의 동북4성으로 만들기 위해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급변사태 발생 시 역사에 대해 무지한 시진핑은 국제사회에 대해 한사군(漢四郡)이 중국군의 압록강 도하의 명분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론상 한반도 북부는 400년간 한사군의 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허구와 과장으로 포장된 잘못된 이론이다. 

 

낙랑군(한사군)으로 둔갑된 우리 낙랑국 

 

전쟁에서 계속 참패하고도 번조선에서 5명의 대신들이 작당해 자기네 왕(우거)을 죽이고 투항하는 바람에 번조선을 평정하게 된 한나라 무제는 항복한 조선의 대신들을 제후로 삼아 그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직할령인 식민지가 아니라 지역 제후를 통해 다스리는 자치령이었다가 얼마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에 의해 와해되어 동명국으로 흡수되고 만다 

 

그러한 근거는 의병에서 시작한 동명왕 고두막한이 지역주민들을 점차 규합해 세력이 점점 커져 상국인 북부여를 굴복시키고 4대 단군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당시 단칸셋방에서 시작한 고두막한이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지리멸멸해 번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지 못했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대재벌이 되는 그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B.C 195년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낙랑국은 대무신왕 15(32)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먼 낙랑공주가 자국의 자명고를 찢음으로써 낙랑국왕 최리가 고구리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렇듯 낙랑국은 최소 역년 227년의 우리 역사로 삼국사기의 초기신라·백제 기록에 나오는 낙랑 모두가 이 낙랑국을 말하는 것이다. 

 

▲ 낙랑공주가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자명고를 찟는 장면     © 편집부

 

이러한 낙랑국()을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시킨 자들이 바로 <한서>를 쓴 반고를 비롯한 중국학자와 이에 부화뇌동한 조선왕조 유학자들이다. 게다가 조선의 역사는 이민족 위만조선과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배의 역사에서 시작했다.”고 역사를 조작한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한사군 이론은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공로(?)로 한국역사의 정설로 정착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세워 통치하던 때인 서기 37년 고구리 대무신왕은 최리의 항복 후 반란을 일으켰던 낙랑국을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그 땅을 철저히 관리하지 않고 방치했다. 결과 44년 후한에서 군사를 보내 낙랑을 쳐서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있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 낙랑군은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겨우 11년간 잠시 있다가 태조대왕 때 요서 10성을 쌓으면서 고구리로 흡수되고 만다. 태조대왕 당시 고구리와 한나라와의 힘의 역학관계를 알려주는 기록 하나를 소개하겠다. 서기 1202월에 상황 신명선제(神明仙帝)께서 붕어하자, 8월에 한()나라 조문사절단이 와서 부의를 바치며 화친을 청했다. 수성이 사신에게 등태후의 나이를 물으니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 태조황제가 쌓은 요서 10성의 위치로 보아 낙랑군이 있을 자리가 없다     © 편집부


 
그러자 수성(遂成)이 말하기를 지난날 여후(呂后-유방 부인)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너희들은 왜 등수(鄧綏-등태후)가 내게 허리띠를 풀고 어육이 되게 하지 않았느냐? (-6대 안제)의 애미(등태후)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라고 했더니, 사신들은 말없이 잠자코 있으면서 황명을 기다렸다

 

태조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이복동생 수성(훗날 차대왕)을 꾸짖자 수성이 다시 아뢰기를 저는 한나라를 초개(지푸라기)와 같이 여기는데, 어찌 제가 그들을 두려워 할 일이 있겠습니까? 너무 심하신 말씀 아니십니까?”라 했다는 <고구리사초·>의 기록이 있어 당시 한나라가 얼마나 능멸 당하고 하대를 당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하겠다 

 

후한을 멸망시킨 장본인은 고구리 

 

왕망이 전한(前漢)의 국권을 찬탈한지 15년 만에 신나라가 무너지고 다시 한나라가 세워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후한(25~220)은 고구리 초기 때 195년간 존재했던 인구 천만 명 내외의 작은 나라였다. ··촉 삼국의 역사서 <삼국지>에 기록된 인구는 위나라가 66만호, 동오가 52만호, 촉한이 28만호로 합계 146만호()에 불과했다 

 

후한이 망한 이유도 바로 우리 고구리(高句麗) 때문이었다. 중국은 중국역사의 아이콘인 한나라가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망해 위··촉 삼국으로 분열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한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고구리와의 전쟁에서 그야말로 몰살을 당하는 참패를 두 차례나 당했기 때문이다 

 

한나라 10만 대군이 고구리로 쳐들어오자 명림답부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치며 수비에 전념하다가, 한나라 병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대열이 흐트러지며 후퇴하기 시작할 무렵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해 좌원(坐原)의 들판으로 몰아넣으니 한나라 군사들이 맞서 싸울 힘도 없이 몰살을 당해 단 한 필의 말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한나라는 이 좌원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하여 국력이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장정 10만 명이 전멸 당함으로써 국가생산력의 극심한 저하를 불러왔고 과부와 고아가 양산되면서 사회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나라는 12년 후 고구리에게 다시 한 번 좌원에서 카운터펀치를 맞고는 멸망의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고국천왕 6(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리를 치니 고국천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천왕이 직접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했는데 베어버린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12년 전 10만 대군이 전멸 당했던 한나라는 이 좌동친전이 치명타가 되어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 고구리에게 참패한 한나라 치하에서는 못 살겠다며 황건을 두르고 일어난 백성들     © 편집부

 

이 전쟁 이후 한나라는 정국의 불안과 가뭄 등 기상이변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름하여 황건기의(黄巾起義)’라고 한다. 결국 한나라는 종말을 고하고 결국은 위··촉 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197)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해 귀순하는 한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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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6 [17:3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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